자의적 절대주의를 경계하자 | 신동식 | 2024-06-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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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적 절대주의를 경계하자 사회주의를 평가할 때 “무법한 편리주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구 소련의 솔제니친의 말로 내적인 편리가 보장된다면 무법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즉 독재를 용인하는 태도입니다. 나의 평안이 보장 된다면 다른 이들의 아픔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상에 물들이면 자신에게 압박이 올 때까지 무법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끓는 물에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와 같습니다. 무법한 편리주의는 자의적 절대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 규칙은 무법한 편리주의에 근거한 자의적 절대주의입니다. 공산당의 생각이 절대적 기준이 됩니다. 누구의 생각도 공산당의 생각에 방해가 되면 얼마든지 제거 할수 있습니다. 무법한 편리주의에 근거한 자의적 절대주의는 참으로 끔찍한 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솔제니친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의적 절대주의”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절대적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합니다. 이 역시 유물론적 세계관에 기반한 태도입니다. 인본주의적 민주주의 사회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틀은 공동체의 다수적 의견이 곧 진리라는 사고입니다. 그래서 다수가 원하면 무엇이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은 법의 영역에서 잘 나타납니다. 미국의 대법원 판사 였던 올리버 핸즈의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진리는 다른 모든 사람을 삼켜 버리는 국민의 다수 표결이다”,“법전이 발전에 관련하여 제기되는 궁극적인 질문은 공동체의 지배적인 세력이 무엇을 원하고 있고, 어떠한 제재가 방해할지라도무시하고 나갈 만큼 충분히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경은 간통은 간음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간통을 형사 처벌하지 않습니다. 다수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자 간통죄를 폐기하였습니다. 태국은 최근에 대마초가 합법이 되었습니다. 공동체 다수가 문제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대마초는 여전히 불법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간통죄처럼 법이 폐기될 수 있습니다. 법의 영역이 자의적 절대주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회 구성원의 유익하다는 입장에서 판결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절대적 판결이 아닌 상대적 판결이 우리 시대의 모습입니다. 또한 의학적인 측면에서도 나타납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를 의학적으로 자의적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표적인 논란이 되는 것으로 낙태가 있습니다. 낙태에 대한 찬반의 논리가 엄청나게 진행 중입니다. 낙태가 죄라는 인식이 당연한 시절이 지나갔습니다. 다양한 이유로 낙태를 합법적으로 허용해 달라는 요구가 분출되었습니다. 결국 대법원은 헌법 불합치 판정을 내리고 입법부에 법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낙태가 합법도 아니고 불법도 아닌 상태입니다. 이 역시 “자의적 법률주의”가 내린 결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현대 사회는 이념의 차이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소수의 결정이냐, 다수의 결정이냐의 차이만 존재합니다. 이때 소수가 틀리고 다수가 옳다고 말할 수없습니다. 또한 다수가 틀리고 소수가 옳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것은 사회적 전제 즉 세계관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기준이 없는 사회에서는 무법한 편리와 자의적 절대는 사회의 중심이 됩니다. 이러한 사회에 인보주의자들의 대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에게는 대안이 있을까?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때 생각할 것은 초대 교회의 역사를 생각하는 일입니다. 초대 교회는 소수의 무리였습니다. 그리고 다수의 우상숭배자들과 인본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정복하였습니다. 그 길은 길고 험하였습니다. 하지만 멸망한 자는 우상숭배자와 인본주의자였습니다. 당시의 믿음의 선배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에 합당한 삶이었습니다. 성경이라는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다수의 세상을 이기는 길은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사는 것에 있습니다. 절대적 기준이 승리하게 합니다. 자의적 절대주의가 아니라 성경적 절대기준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입니다. 신동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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