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갈래 길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 신동식 | 2024-10-04 | |||
|
|||||
두 갈래 길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인생은 늘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정과 직장과 정치를 비롯하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선택합니다. 그래서 선택은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선택하였다가 큰 낭패를 겪을 수 있습니다.
축구는 단체 경기입니다. 그래서 혼자 잘한다고 결코 이길 수없습니다. 전체가 서로 신뢰하고 믿어 줄 때 경기가 재밌고 더불어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각자 행동하면 재미도 없고 승리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감독과 선수들이 우리는 원팀이라고 자주 말하는 이유입니다. 원팀은 신뢰에 바탕을 줍니다. 그래서 한 선수가 다른 선수에게 공을 전달해 줄 때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종종 킬패스(kill pass)라는 말을 합니다. 상대방을 꼼짝 못 하게 하는 패스입니다. 킬패스 하려면 순간적인 선택이 정말 필요합니다. 여기에 실력이 판가름 납니다.
축구만 그렇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선택에 딸 다양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신학과 신앙의 영역에서도 중요합니다. 신앙의 선택은 감정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준을 가지고 선택합니다. 많은 사람이 한결같이 자신은 성경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택 기준은 분명 성경입니다. 문제는 성경에 대한 선택입니다. 이 문제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을 모든 영역에서 참된 기준으로 보는 정확 무오한 영감된 말씀인가? 아니면 신앙과 구원의 영역에서만 오류가 없는 말씀인지 즉 신뢰할 말씀인가? 성경으로 문화를 해석할 것인가?문화로 성경을 해석할 것인가? 역사적 신앙고백이 말하는 성경관을 가질 것인지, 역시비평이 말하는 성경관을 가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창1: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신화로 볼 것인지, 사실로 볼 것인지 아니면 신앙고백으로 볼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이러한 연속선상에서 성경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선택은 매우 어렵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자신이 중세 천년의 신학과 신앙에 대하여 거부하고 선택한 것에 무엇인지를 신앙고백문으로 남겼습니다. 그 고백에 동의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개혁교회를 이뤘습니다. 독일의 개신교회가 있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개혁교회를 강조하였습니다.
이번에 서울에서 행한 4차 세계 로잔대회 성경관은 성경 무오에서 더 멀어졌습니다. 로잔대회는 1974년에 시작된 전 세계 복음주의 자들이 수련회입니다. 이러한 증상을 보여주듯이 합동 교단은 성경에 대한 편집 비평과 유보적 칭의를 말하는 신학에 굴복하였습니다. 성경 비평을 자유롭게 받아들임으로 성경관에서 점점 후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이 아니라 현대주의 신학으로 가는 걸음입니다.
선택을 할 때 정말 고민을 많이해야 합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습처럼 땀 바울이 핏방울이 되는 듯한 절실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지금이 그러한 시기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소리에 응답해야 합니다.
성경은 구원의 영역만이 아니라 우주와 삶과 미래의 모든 영역에 정확 무오한 말씀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사실로서 진리를 전할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진리입니다. 성경은 정치, 경제, 문화를 해석하는 기분입니다. 삶의 모든 체계를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성경관이 견고하지 못하면 문화와 현상에 따라 성경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대마다 구원의 도리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이미 타락한 역사에서 수없이 반복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무거운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교회는 더욱 분명한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믿음의 선배들이 남겨주신 공교회적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성경을 가장 분명하게 가르치는 신앙고백서를 따를 것인지, 성경은 인간 저자의 편집임으로 오류가 있으므로 문화와 시대의 해석된 가르침으로 받아야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점점 두 갈래 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여 주시기를 탄원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