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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27) - 룻기[11] 박석화 2014-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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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룻기4:13-22)

 

 

룻기 4장(2)

 

우리가 룻기를 보면 ‘왜 이런 내용을 기록해 놓았을까?’ 하고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룻기 4장의 마지막에 있는 족보가 없다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로맨스 이야기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룻기가 로맨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족보 때문입니다. 룻기를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어가는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시는 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하시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룻과 전혀 다른 시대와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룻을 통하여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방법은 우리 시대에도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방법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시대와 문화가 다르고 긴 여백이 있는 역사이지만 이 이야기 속에 있는 영적 가르침은 우리에게도 적실합니다. 그래서 룻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저의 제자가 큐티를 하다가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신은 성경은 그대로 읽어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기뻐한다. 그런데 오늘날 설교자들을 통하여 말씀 그 자체를 설교하는 설교자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으니 행복하다.’ 무슨 이야기 인지 아시겠습니까? 저는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가 안 됩니다. 무슨 말이냐면, ‘앞에는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이것을 통하여 은혜를 받는다. 그런데 요즈음 내 주변 어디에서 그 설교를 듣지 못한다. 속상하다. 그런데 나는 은혜를 받고 있다.’ 그 마음은 읽혀졌습니다. 이는 자칫 잘못하면 나는 설교자 없이 성경을 읽으며 은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가 지속되면 교회는 위험해 집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풀어 나누기를 포기하면 교회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룻기를 살펴보면서 느끼는 것은 룻기를 두 남녀의 로맨스 혹은 두 여인의 고난기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뜻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며, 영적인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룻기를 철저히 구속의 관점에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 내용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구속의 관점인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면 위험하게 됩니다. 자칫하면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내용과 상관없이 자의적 해석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을 잘 해석하고 살피면서, 하나님의 전체 역사 가운데 어디에 있는 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비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과 나오미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결국 그 약속을 이행하였습니다. 약속을 지킨 보아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은 바로 아들을 준 것입니다. 이것은 보아스에게 기쁨이지만 더 기쁜 것은 나오미와 룻입니다. 룻이 아들을 낳게 된 것을 보아스는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축하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업을 무를 자를 허락하여 주신 것에 대해서 감격의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보아스와 룻을 통하여 낳은 아이의 이름을 사람들이 지어줍니다. 이 장면은 매우 독특합니다.

 

(룻 4:17)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보아스와 룻의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웃 여인들이 지었다고 합니다. 룻이 아들을 낳았는데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참 독특한 장면입니다. 그 이름을 오벳이라고 했는데, 오벳이라고 하는 말은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은 나오미가 직접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고 나오미의 말년이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벳은 나오미의 말년을 봉양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동서양의 모든 것이 같습니다. 자녀를 낳는 것은 행복입니다. 손주를 낳는 것과 아들을 낳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손주를 가지지 못해서 기쁨을 모르지만, 제 자식에게는 혼을 내지만 우리 교회의 아주 어린 아이에게 혼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손주가 자라면 친구가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손주를 갖는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갖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할머니가 되었다가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은 살날이 점점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손주가 태어났다는 것은 앞으로 나를 기억하는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주를 갖는 것은 자식과 또 다른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혼하면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명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낳았다고 함으로 룻과 보아스,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갈 것이라는 의미가 아들을 낳았다는 말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 하나 하나가 4장 마지막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벳은 한 생명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을 이어갈 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룻기의 마지막은 단순하게 결론 부분으로 지나가서는 안 되고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깊은 뜻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볼 수 있는 사실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나오미와 룻의 신앙을 기뻐하시고 인정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1장부터 시작된 나오미와 룻의 여정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손 안에서 나오미와 룻이 분투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최선을 다하여 달려가는 것을 이제 4장에 오니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오미와 룻의 아름다운 신앙을 기억하였고 보았습니다. 그 아름다운 신앙을 열매로 그의 신앙을 인정하여 줍니다. 하나님이 나오미와 룻의 신앙을 인정하였다는 것은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는 아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취하자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복을 허락하여 주셨는데, 바로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룻 4: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께서 그 생명을 주셨는데 놀랍게도 첫 자녀가 아들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임하였다.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어갈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룻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룻이 아들을 낳음으로 그가 기업 무를 자로 완수한 것입니다. 얼마나 복이 있는 것입니까? 대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가문이 무너지지 않고 가문이 지속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볼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오미와 룻을 복되게 여겨주신다고 인정하지 않을까요? 두 번째는 사람들로 하여금 칭송을 받게 하였습니다.

 

(룻 4: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내 가문이 이어지게 하셨다. 가문이 끊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가문이 이어지는 존재가 되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기업 무를 자가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나오미와 룻이 기업 무를 자의 역할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나오미와 룻은 어떠하겠습니까? 그 공동체에서 초라한 역할이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늘 속에서 살아야 하는 자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게 복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축복을 주셨기에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칭송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이가 이스라엘 중에 유능하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가문에 태어난 아이가 아닙니다. 오벳의 어머니는 이방여인입니다. 이는 정말로 기뻐하는 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보아스가 들었습니다. 보아스를 향하여 내가 유명케 되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결국 아버지 보아스도 유명하게 되고, 보아스의 가문이 대대손손 이루어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것입니다. 최고의 축복 아닙니까? 나에게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도 주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왜 이런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까? 나오미와 룻의 신앙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룻으로 하여금 그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시켜 주셨음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룻 4: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룻을 향하여 사람들이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사람을 통하여 들려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사람들을 통하여 들려지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를 통하여 욕하는 것은 하나님의 채찍의 소리를 들어야 할 때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오미에게 룻이 일곱 아들보다 귀하다고 말합니다. 룻이 아들보다 귀한 자부입니까? 룻은 이방의 여인입니다. 사람들이 이방 여인을 칭찬할 이유가 없습니다. 선민의식을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사고에 의하면 이방 여인에 대한 생각은 그리 선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룻을 향하여 나오미를 향하여 일곱 아들보다 귀하다고 말하자나요. 아들은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니 아들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스라엘 여인들이 한결 같이 고백하는 것은 일곱 아들보다 좋기 아니한가라고 하는 것은 룻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와서 행하였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룻기를 보면 룻이 어머니를 따라와서 보리를 주어온 것 밖에 없습니다. 대단한 신앙의 안 보이지만 보아스에게 한 이야기에 옛 시모에게 한 말을 알 고 있다. 보아스가 사람들을 통하여 네게 시어머니에게 한 일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인들이 일곱 아들보다 나은 자부라고 합니다. 룻이 얼마나 시어머니에게 정성을 다했는지, 하나님의 믿는 참된 모범을 룻을 정확히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있던 여인들도 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룻은 자신의 자랑한 것이 아니고 주변의 사람들이 믿음의 여인이라고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아들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이것만큼 더 높은 칭송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룻을 이렇게 인정하여 주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떨어진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와 룻의 신앙을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신앙을 보고 기뻐하셨을 뿐만 아니라 구속사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바로 룻을 통하여 나온 오벳에 대한 기록에서 알 수 있습니다.

 

(룻 4:16)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룻은 오벳에 대한여 욕신적인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룻의 자녀입니다. 본문에서는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오벳을 키운 사람을 나오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벳의 육적인 어머니는 룻이었지만, 영적인 어머니는 나오미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오미의 신앙이 오벳에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의 한 구절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디모데입니다. 디모데가 아름다운으로 자랄 때 바울이 이야기 하기를 너가 네 어미니와 외조모를 통하여 신앙의 전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의미는 우리가 오벳이 어떻게 살았는지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족보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오벳은 신앙으로 잘 양육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벳의 아들이 이새입니다. 이새의 아들이 다윗입니다. 다윗의 할아버지가 오벳입니다. 다윗의 고조 할머니가 나오미입니다. 신앙의 젖줄기가 얼마나 아름답게 흘러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쓰임을 받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가장 천한 자리에 떨어졌는데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로 한 통로로 사용하였다. 나오미가 알았겠습니까? 이 오벳을 통하여 다윗이 나고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고 나오미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쓰신 것입니다. 정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룻과 나오미를 구속의 물줄기로 사용한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보아스와 룻과 그 아들의 가문에서 그리스도가 나게 되는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 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열심과 노력을 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룻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가르침을 잘 들어야 합니다. 모압으로 가는 나오미의 삶은 기대에 부풀었지만, 언약을 어긴 백성에게 주어진 것은 피폐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러한 순간에 자신의 길을 되돌입니다. 회개합니다. 믿음의 결단을 합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길로 돌아섭니다. 자부인 룻도 황폐한 가운데 믿음의 결단을 합니다. 하나님은 나오미와 룻의 신앙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놀라운 은혜의 복을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속사 측면에서도 동이랗게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언약의 말씀에 대한 고백과 결정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고백하는 것과 결정하고 인내하는 것을 통하여 그이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가 가야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구속사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룻기의 마지막은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케 되는 역사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이방 여인이 하나님을 만나고 회심한 백성으로 어려운 환경 가운데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선 것은 그 자체로 은혜를 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개천에서 용 난다는 것이 불가능한 세상이고, 백이면 백이 다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땅에서 이러한 생각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어떤 자리에 설 수 없을 같은 여인을 모든 것을 다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의 우뚝 선 여인으로 만드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여인 룻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을 예배케 하였고, 그의 가문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오게 한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로만 끝났다면 룻기는 별다른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룻과 보아스를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셨습니다. 룻기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역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룻기가 사사기 다음에 주어진 것을 생각해보면, 사사기의 상황을 보면 이스라엘은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혼돈 가운데 한 사람을 예비합니다. 자기의 소견 가운데 살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여인을 예비시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자신의 소견과 지식으로 사는 시대가 우리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견에 따른 사람을 통하여 그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작은 자 하나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룻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은 포기되지 않고 지속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혼돈 된 된 세상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의 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일하신다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들을 낳았다는 장면은 역사적 전환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자기 소견에 따라 사는 자를 통하여 일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통하여 그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의 멸망을 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이 땅의 나라는 영원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만이 영원함을 보았습니다. 당시 로마는 전 세계의 유일한 나라로 보였습니다. 로마를 거치지 않고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세계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 로마가 멸망할 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로마가 멸망할 때 어거스티은 하나님 나라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그 어떤 세력도 가치가 없다는 것을 본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살면서 하나님 없는 세대에 한 사람 룻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자기 소견대로 살 때 한 사람의 순종하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됩니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칠천 명이라는 엘리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늘 역사 가운데 존재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그 역사를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룻기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역사의 흐름에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으로 일하시지 않고 사람을 통하여 일하셨다. 사사기 상황을 보게 되면 자기 소견 가운데 사는 시대 가운데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면 쉽고 편하고 간단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엉망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이 직접 개입해서 평정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쉽고 간단하잖아요. 그러나 아담 이후 역사 가운데 단 한 번도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의 일을 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물론 때때로 바벨탑 사건에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셨지만, 그 안에도 하나님의 사람을 일하심을 보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일꾼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데, 그 일꾼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가십니다. 사실 룻은 혈통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룻은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쓰임 받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혈통을 뛰어 넘는 것이 믿음때문이었습니다.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 나라는 육정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 하나님의 뜻을 믿는 자들을 통하여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룻은 아이는 이스라엘 중에 가장 유명한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을 통하여 성취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습니다. 이스라엘 향하여 룻이 난 아이 오벳을 향하여 말하기를 유명케 되기를 칭송하였는데, 오벳 자체를 유명했습니까? 다윗을 통하여 성취됩니다. 그리고 그의 가문에서 그리스도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흘러나올 대 오벳의 이름이 나옵니다. 오벳이 무명한 자입니까? 유명한 자입니까? 유명한 자가 된 것입니다. 오벳의 사람이 유명해 진 것은 믿음의 사람 나오미와 룻으로 인합니다. 역사는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루어지심을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외적 조건이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고전 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아무리 사람이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미련한 것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룻의 모습을 보면서 이 고백을 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가진 외적 조건을 본다면 가진 것이 없습니다. 외적 조건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순전한 믿음을 가진 자를 준비시켰고, 그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갈 때 작은 자 같고 무명한 자이나 외적으로 볼 때 가치가 없는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의 한 물줄기를 감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 같은 것이 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말씀의 결단을 통해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의 물줄기로 우리로 사용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쓰임 받는 것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이러한 은혜를 바라보면서 내 삶의 안위 말고, 우리에게는 고귀한 가치가 있는데,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하나의 작은 물줄기가 되는 것을 소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구속의 물줄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믿고 기도하고 뚜벅뚜벅 믿음의 길을 가는 이유입니다. 이 믿음의 길에 함께 동참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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