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41) - 사무엘상[14] | 정대원 | 2015-02-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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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연구 (사무엘상 4장 1-11절)
사무엘상 4장 (1)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첫 번째 전쟁에서 대패하자, 실로에 가서 언약궤를 가져오자고 이스라엘 장로들이 말합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가져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난리가 났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자부심이 생긴 것입니다. 5절에 보면, 땅이 울린지라 기록합니다. 함성소리에 진동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대가 대단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것이다 자부하였지만, 4만명이 죽습니다. 대참사가 일어난 것이죠. 그리고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아사왕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100만 대군을 물리쳤지만,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떤 차이일까요? 오늘 저는 그 원인을 생각해보고 기도의 제목을 삼고자 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을 통해 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왜 이들은 큰 참패를 겪게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을 떠난 비인격적 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비인격적 신앙은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블레셋에 대패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왜냐하면 비인격적 신앙은 자기 확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3절 봅시다.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언약궤가 없어서 졌구나. 생각한 거예요. 블레셋에게 참패했을 때 해야만했던 일은 회개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 있었잖아요. 4장 1절 봅시다.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홉니와 비느하스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왔음을 알았으면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것이죠. 왜죠? 살아계신 하나님께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가져오는거예요. 언약궤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믿음의 상징이거든요. 믿음의 고백이예요. 그런데 그들은 언약궤를 부적으로 사용한 것이죠. 거기에 인격적 신앙이 있지 않은 것입니다. 내 믿음 상관없어요. 언약궤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 참패의 원인이었습니다. 여러분. 비인격적 신앙을 가지고 구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확신에 불과합니다. 십자가를 거는 행위등등은 비인격적인 것이죠. 그러나 십자가를 부적으로 생각하는 잘못을 하곤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확신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가지않고 자기확신 속에 살아갑니다. 예배는 무엇을 얻기위해 드리는게 아니고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기위해 하게되면 기득권을 사용하게 됩니다. 사악한 신앙인 것이죠. 은혜받았다면, 은혜의 열매가 예배고, 헌상이고, 봉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예배를 못 드립니다. 또 하나는요, 6-10절을 보면 패배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블레셋은 엄청나게 준비합니다. 대장부와 같이 말이죠. 이스라엘의 모토이기도 하죠. 다윗이 죽을 때, 유언을 남깁니다. 대장부라는 단어를 통해서 말이죠. 그런데 블레셋이 이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인격적 믿음의 신앙이 없으면 무기력한 것입니다. 종교적 신앙만 있어도, 교회만 다녀도 무기력할 수 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인격적 신앙이 없어서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형식에 매달리면 소망이 없습니다. 무기력은 어떤 능력도 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땅이 진동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참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습니다. 능력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걸 보여줍니다. 그래서 쉽게 무너지는 이유는 인격적이지 아니하면 조그만 시험 앞에도 다 무너집니다. 바람 살짝 흔들어도 넘어갑니다. 하나님과 맺은 신앙이 없으면 그렇게 됩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금새 와르르 무너집니다. 살던 집이 어려워져서 작은 집으로 내려갔다. 어떡하시겠어요. 월세에서 전세로 집을 사는 건 잘하지만, 집을 샀다가 전세에서 월세로는 창피하고 부끄러워합니다. 정말 그런가. 신앙의 눈으로 보자는거예요. 왜 이런 아픔이 왔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참패했을까. 생각을 했어야 하는거죠. 저는 어려움이 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시험을 주는 것이죠. 나랑 인격적 신앙을 다시 회복하자는 부르심인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복을 받습니다. 솔로몬이 한 일은 미디안 광야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인격적 신앙을 갖자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한 일도 회개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상숭배하듯이 하나님을 섬겼다! 라고 질책하고, 다시금 인격적 신앙의 자리에 돌아가서 다 회개하자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의 순간에 비인격적 신앙의 자리에 서는 것이죠. 영적 침체라는 자리인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 다시금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요새요, 방패요, 모든 것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나한테 없는게 없다. 그런데 왜 나 외에 다른 것으로, 그리고 나를 우상숭배처럼 섬기려 하느냐. 이게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세 번째, 11절 봅시다.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게됩니다. 실언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악을 향하여 내가 저희를 죽이겠다. 자손이 손자를 보지 못할 것이다. 말씀하셨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너무 잔인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고, 반드시 실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맺으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영적 지도자에 대한 범죄에서 결코 눈 감지 않는다. 지금 좀 잘 나간다해도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앞선 지도자들의 삶이 거룩하고 정결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맥을 못 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라 그랬습니다. 저 뿐 아니라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물론 목사로서 부름받은 자가 더 정결해야 합니다. 목사 손가락질 하지 마시고, 다 부름 받았습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말이죠. 저는 거기에 하나 더 있을 뿐입니다. 교회 역할을 맡은 거죠. 그러므로 우리는 다 영적인 지도자인 것입니다. 이게 다 우리의 신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베푸신 약속이 어마어마합니다.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의 축복과 저주는 어마어마한 축복을 주셨죠. 또한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모습도 다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감당치 못하면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것을 의심하면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죄 짓는 것이죠. 그래서 이 사건을 통해 얼마나 신실한 존재인지 보여줍니다. 그럼 우리의 기도제목을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을 떠난 신앙은 자기 확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비인격적 신앙은 정말 무기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라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깊이 생각해봅시다. 하나님 앞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있는가 생각하며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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