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식 칼럼] 터가 무너진 공교회 | 정대원 | 2014-07-22 | |||
|
|||||
“이곳 아니면 교회가 없나” 목회를 하다보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한번은 6개월 정도 교회를 다녔던 분이 교회 떠났습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과 함께 교회를 다니고 싶어서 옮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쉽지만 가족이 함께 다니는 것이 좋은 일이기에 잘 다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한 성도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이 교회를 옮긴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교회는 6개월 정도 다니면 집사 직분을 주는데 우리 교회는 1년을 다녀도 직분을 주지 않는다면서 교회가 여기만 있냐고 하면서 화를 내었다는 것입니다. 이 뿐 아닙니다. 교회에서 문제가 있어서 징계를 내렸어도 그 다음에 다른 교회로 옮겨서 자연스럽게 신앙생활 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더구나 장로나 안수집사와 같은 분들이 올 때 교회로부터 직분 확인서나 이명증서와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은 채 직분을 인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교회가 가진 공교회성이 얼마나 무시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70년대만 해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될 때 그 교회 주보를 가져오면 교회 출석이 인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가 되어 있다는 공교회성에 기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를 옮길 때에도 이명증서가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또한 교단을 옮기는 경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장로교인이 감리교나 순복음으로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사를 가더라도 반드시 자신이 다녔던 교단 교회로 옮겼습니다. 그 만큼 교회의 교리 교육과 신앙 색깔에 대하여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90년대를 지나면서 이러한 모습은 다 사라졌습니다. 장로교회에서 집사를 가진 분들도 자여스럽게 감리교나 순복음으로 옮깁니다. 마찬가지로 감리교나 순복음에 있던 분들도 자연스럽게 장로교로 이전합니다. 더 이상 이명증서가 필요 없습니다. 또한 이들에 대한 교리적 교육도 전무합니다. 모두가 제자훈련이라 이름으로 통일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전의 교회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있었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인이 증가하는 것 뿐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나은 결과 대형교회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수평이동을 통하여 교회가 대형화 됩니다. 그리고 교단적 특색은 다 사라지고 맙니다. 장로교 오순절교, 감리교 장로주의, 침례교 장로주의, 오순절 장로교라는 말이 나오므로 특색 없는 현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목회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교회는 다 똑 같고 교리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합니다. 언뜻 보면 하나의 교회가 된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떠한 치리도 없는 무질서한 교회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표지 가운데 반드시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징계는 교회를 거룩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치리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곳만 교회냐는 생각이 깊이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옆 교회로 가면 기쁘게 받아 줄 것인데 피곤하게 신앙생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교회들은 성장 제일주의에 빠져있기 때문에 더 이상 징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징계는 교회 성장을 포기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교회의 공교회성이 완전히 박살났기 때문입니다. 공교회성이 박살 난 틈을 타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 바로 이단입니다. 이단들은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원칙을 포기한 것을 미끼로 자신들의 교리를 체계화 시켰습니다. 결국 이들의 수법은 공교회성이 무너진 교회에 대하여 환멸을 느낀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였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단 단체에 출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단들 대 부분은 기존 교회를 다녔던 이들이라는 사실에서 공교회성의 무너짐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 하였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곳 아니면 교회가 없다는 생각은 교회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것뿐 아니라 성도의 정체성을 흔드는 일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가볍게 여기는 행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만연되면 세상은 교회를 우습게 여기게 되고 결국 교회는 깊은 멍이 들게 됩니다. 특별히 교회의 공교회성이 흔들리는 경우는 타락한 목회자들에 대한 징계가 없다는 것에서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한 예로 성추행을 한 목사는 버젓이 교회를 나와서 또 다른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사람의 명성을 따라 모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공교회성이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감하게 징계를 내리고 면직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많은 성도들이 미혹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파렴치한 목회자들이 지역만 달리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들은 빈번합니다. 공교회성이 무너지니까 이들은 회개하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와 함께 사교집단을 형성을 합니다. 공교회성이 견실하다면 이들을 철저하게 회개시키고 치리한 후에 해벌하고 받아들이는 거룩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데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교회를 얼마나 하찮게 생각하겠습니까? 또한 한국 교회에는 대표적인 연합단체가 있지만 대 부분 그 기능을 정치적 영역에만 쏟아 놓고 있지 교회의 거룩성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습니다. 단체 스스로의 거룩함을 상실하였기에 세상은 교회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개독교라는 이름을 듣게 된 이면에는 이러한 공교회성의 상실에 있습니다. 공교회성은 우선적으로 교단이 자신들이 가진 교리와 헌법에 정결하여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교리와 헌법이 유명무실합니다. 총회가 세속화되면 교회는 거룩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디에서도 공교회성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각 교단들이 거룩함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원래 가졌던 원리에 충실하다면 교회는 거룩성을 회복하게 되고 세상으로부터 의미 없는 무시는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기본적인 터가 균열되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촉즉발의 위기 가운데 서 있습니다. 화려하게 보이는 교회는 점점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교회를 떠받고 있는 것은 말씀이 아니라 세속적 가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크고 넓고 높은 것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서 교회는 흔들거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잠시 견딜지 모르지만 삼풍백화점처럼, 성수대교처럼 무너지는 날이 올 수 있습니다. 다시금 터를 견고히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집니다. 즉 삼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집니다. 세속적인 세계관을 건져서 던져 버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날이 오기 전에 그리스도의 몸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교회를 회복하는 개혁이 필요합니다. 점점 늦어지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해야 하지만 곤고한 날에는 생각해야 합니다.[전7:14] 지금은 형통한 날이 아닙니다. 곤고한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터가 견고한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가 건강한 공교회성을 가지고 있는 고찰해야 합니다. 지금의 한국 교회는 그러한 시점에 와 있습니다. 일부의 큰 교회들이 잘 나가고 있다고 속이고 있지만 그러나 터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무너지는 터를 견고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일을 감당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 일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랍니다. 성령의 일하심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시 11:3]”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