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14) - 사사기[28] | 박석화 | 2014-04-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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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사사기19:1-30) 사사기 19장 오늘은 사사기 19장에서 비참한 장면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없는 세대의 자화상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 언약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도저히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세대가 맞이하는 결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을 통해서 우리 시대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유익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슬픔의 자리에 서지 않으려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훈을 잘 본 받는 것이 필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1-2절을 보면 레위인이 첩을 가지게 되고, 그 첩이 살다가 친정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8절은 첩을 찾으러 가는 레위인의 모습을 봅니다. 9-10절은 레위인이 그 첩을 얻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려고 베들레헴을 떠나는 장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11-15절까지는 레위인이 돌아오다가 이스라엘이 아니라 베냐민 지파 기브아에 유숙하게 들어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6-22절은 독특한 장면으로 기브아에 관련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때 한 노인이 레위인 일행을 맞이하고 자기의 집에 레위인을 모시게 됩니다. 23-26절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에서 일어났던 비참한 일이 기브아에서 일어납니다. 기브아의 난봉꾼들이 레위인의 첩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27-30절은 비참한 모습인데 레위인이 첩을 12토막을 내서 각 지파에 보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런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본문 전체의 흐름을 요약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사사기 18장 1절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라는 말씀과 19장 1절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라는 말씀처럼 왕이 없을 때 나타나는 악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왕이 없을 때 우리가 첫 번째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없는 곳에는 타락이 주인 노릇합니다. 먼저 레위인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다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제사장 가문이 레위인이 사람이 타락한 장면입니다. 레위인 사람은 성막에 봉사하는 사람이 타락한 것입니다. 첩을 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첩을 두는 것에 대해서 율법적으로 금지하거나 죄를 묻는 장면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첩을 두는 모습이 종종 보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제사장이라고 한다면 상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레 21:7) 그들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말 것이며 이혼 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께 거룩함이니라 물론 여기서 기생과 부정한 여인이 첩에 저촉되는 것은 논의할 내용입니다. 그러나 다른 여인을 첩으로 삼는 것은 종교 지도자로서 바르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이 여기에 잘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보게 되면, 첩 여인이 레위인에게 도망쳐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제사장이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오려고 합니다. (삿 19:3) 그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하나와 나귀 두 필을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비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비가 그를 보고 환영하니라 그 첩이 행음하여 레위인을 떠났고, 레위인은 그 여인을 다시 데리고 오려고 간 것입니다. 첩의 아비가 레위 사람이 환영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사위를 보고 환영하였을까요? 환영한 이유로 첫째는 두 사람 사이가 악화되어서 별거한 상황이었는데, 사위가 와서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생각했기에 기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첩이 행음하여 도망한 상황에서 이러한 모습을 기뻐하고 환영하였을까요? 두 번 째로는 유다 지파의 장인이 환영한 이유는 결혼 예물을 주지 않게 됨을 기뻐한 것입니다. 당시에 보게 되면 원래 많은 결혼 예물이 필요한데, 사위가 와서 직접 와서 딸을 데리고 가려고 하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도 잘 생각해 보면 지극한 물질중심과 자기중심으로 빠져 있는 것을 봅니다. 불의한 일에 대해서 어떠한 책망도 없습니다. 딸이 음행을 하고 왔으면 아비의 입장에서 책망을 해야 합니다. 책망을 하였다는 모습은 없고 사위가 온 것에 대해서 환영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회 속에서 이들에게 정의라고 하는 것, 윤리라고 하는 것은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철저하게 유다 지파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 소견대로 사는 전형적인 모습이 이 부분에서도 보여 지는 것입니다. 유다 지파에서 나타나는 타락된 모습입니다. 본문에서 또 다른 타락된 모습은 베냐민 지파, 기브아 사람들입니다. 여부스로 가지 않고 기브아로 갔습니다. (삿 19:15)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이켜 들어가서 성읍 거리에 앉았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었더라 성읍 거리라고 하는 것은 도시의 중심인데, 그곳에 거하였습니다. 어두운 밤에 왔으니 누구든지 자기 집에 초청하는 것이 원래 이스라엘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러한 모습이 없습니다. 손님 접대하는 모습은 율법의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하나님 백성으로 아름다움이었는데, 베냐민 지파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유숙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삭막한 모습입니다. 왜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았을까? 물론 자신의 집이 어렵고 가난하면 데리고 오면 손님에게 불편만 주고 무시당할까 하여 데리고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가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귀찮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나눔이나 베풂이라는 것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누가 나의 이웃이냐고 하였을 때, 마치 율법사와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캄캄한 저녁에 갈 곳이 없어 헤매고 있는 자들에게 데리고 와서 유숙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모습인데,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든, 굶든 아무 관계를 하지 않는 것이 베냐민 사람의 모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서 성령 하나님이 계시면, 가난한 자와 배고픈 자와 약자를 보면 우리의 양심이 작동하지 않겠습니까? 베냐민 지파에게는 이런 양심의 작동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22-25절을 보면 성읍들의 이 성읍의 비류들이 하는 악행을 보게 되면, 베냐민 지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보여줍니다. (삿 19:22)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비류들이 그 집을 에워 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 상관하리라는 단어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롯의 집에 찾아왔던 천사들에게 비류들이 한 말입니다. 동성 간의 성관계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베냐민 지파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였음을 보여줍니다. 레위 지파의 타락, 유다 지파의 타락, 베냐민 지파의 타락을 보여줍니다. 이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는 상태에 나타난 타락상을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타락한 자리에 있게 됩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교만과 사악함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가르침과 명령이 들어오지 않고 자신의 방법대로 살아갑니다. 자신의 방법으로 살아갈 때 나타나는 것은 양육강식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를 채우고 자신의 배만 부르게 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타락한 시대의 모습입니다. 죄악이 편만한 노아의 시대의 모습, 바벨탑 시대의 모습,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모습, 1세기 디도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을 전멸되었던 모습, 모세 시대 때 바로의 애굽의 모습, 하나님 없는 시대의 잔인함은 다 있는 것입니다. 성적인 타락, 물질적 타락, 이기적 모습, 자신이 왕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 이런 총체적 타락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그렇게 됩니다. 타락한 세상 가운데 극도의 타락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흘러 보내기 때문에 우리의 양심이 딱딱한 돌처럼 굳지 않고 살아있기에 더 큰 악행의 자리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다고 생각해보면 끔찍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개인은 물론이고, 가족, 나라와 열방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큰 선물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서로를 생각할 수 있는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온 것은 복된 것입니다. 이번 복음 사경회 주제가 예수의 십자가,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신이 왕 노릇할 때 나타나는 잔악한 타락의 모습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잔악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 지는 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로 그 불량자의 모습에서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앞에 있는 레위인의 첩인 여인이 행음하고 떠난 장면에서도 인간의 타락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습보다 더 잔악하게 드러나는 것은 베냐민 사람의 모습이고, 더 잔악한 것은 레위 사람입니다. 레위 사람은 온유한 것처럼 보이나, 자신의 첩을 데리고 갈 때는 설득하여 데리고 가겠다고 하였으나, 비류 앞에서 그 여인을 내던집니다. 타락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위기가 처하자 비류들에게 던집니다. 그리고 밤새 아무 관심도 가지지 않고, 아침에 문고리를 잡고 있었던 여인에게 일어나 가자고 합니다. 여인이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은 밤새 참혹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을 열자 떠나자고 합니다. 첩이 고통을 당할 동안 자신은 잠을 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 잔혹하게 됩니다. 그 분함에 못 이겨 첩을 12도막을 냅니다. 그리고 복수하기 위하여 열두 지파에게 보냅니다. 과정을 보십시오, 인간이 얼마나 잔혹한지 모릅니다. 이 장면에서 인간이 이렇게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타락하고 분이 넘치면 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인간 세상은 정말 비참합니다. 본능만 남아 본능에 따라 살 때 정의와 윤리가 없습니다. 오직 거기에는 자기 소견대의 옳은 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해 볼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8-19장에서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은 왕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절대적 기준을 상실한다는 것은 모든 관계가 비참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는 분명한 고백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만이 참혹한 타락과 인간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 나의 주라고 하는 고백이 참혹한 세상과 인간 틈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감사합니다. 우리를 잔혹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고 우리를 건져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도 전에 어둠 가운데 거하던 자였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 의해서 잔혹함을 즐기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를 타락으로 떨어뜨리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이끌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내가 그런 은혜를 받으며 사는 자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 이 타락한 세상과 잔혹한 인간과 달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에 대해 존중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사는 것은 타락한 잔재물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럴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미혹하고 유혹합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신앙 고백을 날마다 가져야 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내 삶과 내 입술을 통하여 늘 반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추악한 자리로 빠지지 않고 하나님께 맡긴 은혜의 자리 로 갈 수 있습니다.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우리의 분명한 신앙 고백이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것입닏.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신앙 고백이 내 삶에 드러나는 동시에 여호와를 아는 일에 힘써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입술의 고백과 삶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워져 나갈 때 타락한 세상과 잔혹한 세상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답게 이 세상에서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힘써 아는 것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야합니다. 성도는 목회자를 위해서, 목회자는 성도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러 기도의 모습이 있습니다. 가정, 지혜, 말씀을 전하는 능력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잊지 말고 기도할 것은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죄를 이기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미혹함이 많은지 모릅니다. 타락하게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마치 제가 양쪽 낭떠러지에 있는 길로 가는 듯합니다. 저도 인식하지 못한 상황 가운데 타락의 소굴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광명한 천사처럼 다가옵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무너지고 맙니다.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죄와 잘 싸울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목사 역시 성도들을 위해 죄와 싸우고 이길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서 서로 받아야할 의미요 적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기도합시다.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저 역시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그래야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하고 기도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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