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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15) - 사사기[29] 박석화 2014-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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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사사기20:1-48)

 

 

사사기 20장

 

사사기 20장에서 와서 끔찍한 사건을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끔찍한 일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6.25가 근세에 있었습니다. 동족상잔의 큰 비극이었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것처럼 끔찍하고 아픈 것은 없습니다. 이 일을 겪지 않는 사람과 겪음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고 역사를 보는 것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같은 형제이고 같은 곳에 살고 있다하더라도 이러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역사 인식, 이념, 사람에 대한 포용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6.25를 경험했던 분들은 공산주의에 대해서 아직도 이를 갑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이를 이용하여, 때가 되면 응어리진 마음에 분을 품게 합니다. 그래서 선거만 되면 북풍이 불어오고, 요새는 종북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는 전쟁을 겪은 사람을 가슴 어린 것을 건드려서 분노하게 하는 것입니다. 동족상잔의 사건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사악함입니다. 같은 동네 있어도 서로 죽이고 죽여야 하는 비극한 상황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형 동생 하던 사이가 총을 겨누는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제 정신일 수 있을까요? 이를 겪은 사람들의 심리적 분노는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러한 내용입니다. 사사시대 때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사사기 20장에 나오는 베냐민 지파와 이스라엘과의 싸움입니다. 같은 형제가 죽이고 죽여야 하는 비참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가?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야만 하는가? 하나님은 이런 비극에 대해서 왜 허용하셨는가? 우리는 참 낳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방인에 대해서 싸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같은 자녀입니다. 같은 형제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베냐민을 향하여 우리의 형제라고 인식합니다. 그런데 형제라고 인식하고 있는데, 형제 끼리 죽이고 죽이는 일의 비극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런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사시대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모습은 사사기를 흘러가고 있는 흐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을 때 나타나는 처절한 결과임을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조는 생각하여 보겠습니다. 본문은 총 48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3절은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의 총회입니다.

 

(삿 20:2)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이었으며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총회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4-7절은 베냐민 사람들에게 당한 일을 보고 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8-11절은 베냐민 지파를 칠 것을 결의하는 총회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고나서 12-16절까지는 베냐민 지파를 치기 전에 징계의 실행으로 그 사건의 원인이었던 비류들을 징계하는 데 베냐민 지파의 거부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17절 이하는 세 번의 전쟁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17-25절은 이스라엘 지파가 베냐민 지파에게 두 번 패합니다. 26-36절은 이스라엘 지파가 베냐민 지파를 전멸시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6-48절은 베냐민 지파의 패배의 과정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본문 20장을 통하여서 우리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구조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재미있는 사실, 잊어서는 안 되는 내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정직함이 사라지면 반드시 위기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볼 수 있는 내용을 보면, 첩을 잃고 12토막을 내서 자기 지파에 보냈던 레위인의 분노와 아픔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당한 사실에 대한 정직한 고백을 했더라면, 이스라엘 총회가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거짓된 보고와 섣부른 판단이 공동체의 위기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형제와 형제를 죽이게 되는 슬픈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삿 20:3) 이스라엘 자손의 미스바에 올라간 것을 베냐민 자손이 들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 악한 일의 정형을 우리에게 고하라

(삿 20:4)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내 첩으로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삿 20:5)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나의 우거한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한지라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이 말이 맞습니다. 자신을 욕보이려고 하고, 첩을 죽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정직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레위 사람이 첩을 내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첩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밤새 쿨쿨 잠을 잤던 사람입니다. 첩이 문고리를 잡고 있는 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았던 그는 이 모든 내용을 감추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정직함이 없고 사적인 분노만이 있는 것입니다. 사적인 분노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거짓말이라는 것은 총체적으로 하면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거짓말은 총체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부분에서만 왜곡하는 것입니다. 레위사람은 중요한 부분만 왜곡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고, 자신에게 합당하지 못한 행위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감추고 저 사람들이 내 첩을 죽였다는 것만 이야기 합니다. 첫 번째 거짓말이 나타나고, 이것이 민족의 위기를 나타나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를 보게 되면,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에 총희가 결정한 내용을 봅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레위인의 이야기를 듣고 분노만합니다.

 

(삿 20:7)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은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

 

이들이 이 이야기에 대해서 분노합니다.

 

(삿 20:9) 우리가 기브아 사람에게 이렇게 행하리니 곧 제비 뽑아서 그들을 치되

 

그리고 11절에서는 베냐민 지파를 치려고 모두가 한 성읍에 모인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이 총회의 참된 모습이라고 보십니까? 자기 지파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사실 확인을 하지 않습니다. 총회가 온전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랬을 경우 베냐민 지파를 불러서 자초지경을 물어야 합니다. 일단은 레위인이 보낸 고소한 사건에 대해서 2-3사람의 증인을 보지 않고 섣부른 판단을 합니다.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심각하지만 그 대상자가 형제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법에 의해 절차를 잘 지켜야 하는데, 그 모습이 없었습니다.

세 번째는 이스라엘 총회는 결의를 해서 베냐민 지파에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준행하여 비류를 붙여서 죽이게 하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총회는 비류들을 보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냐민도 총회의 한 소속이기에 총회 결의를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는 총회 결의를 따르지 않습니다.

 

(삿 20:13)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 곧 그 비류를 우리에게 붙여서 우리로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삿 20:14) 도리어 각 성읍에서 기브아에 모이고 나가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니

 

이해가 안 됩니다. 행간에 어떠한 일이 있었기에 이러한 결절을 하였을까요? 총회의 결의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총회의 결의에 의해서 베냐민 지파가 따라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의 말을 듣지 않고 싸우자고 합니다. 이러한 결정이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 내용들이 본문에 정확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어디에도 총회의 결의에 대해서 문제가 있으니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다. 본문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베냐민 지파가 총회의 결의를 무시하였다. 12절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 총회는 베냐민 지파의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베냐민 지파를 악의 근원으로 정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내려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여 보면 비류니까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베냐민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총회가 가지고 있는 섣부른 판단이 베냐민 지파의 심기를 흔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베냐민 지파는 조금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삿 1: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 가운데, 이방 민족인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므로 이방 민족인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지파와 함께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베냐민 지파이 결정한 내용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비류들이 혹시 여부스 족속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베냐민 지파와 함께 이방 민족이 함께 공존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도 역시 민족 안에서 발언권과 권한을 가지고 있었겠지요. 이러한 상황들을 생각하여 보면, 베냐민 지파가 이스라엘 총회에 대해서 거절 한 것은 베냐민 지파의 내적인 모습과 함게 총회의 섣부른 판단을 합하여 베냐민 지파는 자기 소견대로 옳은 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부가 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이 다 보입니다. 레위 사람도, 총회도 분에 못 이겨 결정하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도 악한 것을 떠나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느 것 하나 정직하게 이 문제를 대하는 것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내려놓고 정직하게 해결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니 거짓이 나오는 것입니다. 거짓은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동체의 위기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떠한 사건과 상황 가운데 하나님 앞에 묻고 정직하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사적인 감정으로 대하면 위기가 찾아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않으면 다 위기가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두 번째 장면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하면 위기가 찾아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두 번째는 본문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심판은 정직하게 시행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였습니다. 베냐민 지파와 이스라엘 백성, 둘 다 백성 치리를 합니다. 군사 숫자로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사십 만 명이고, 베냐민 지파는 일만 이천 명입니다. 비교도 안되는 싸움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베냐민 지파는 싸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결정을 합니다.

 

(삿 20:18)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먼저 일지니라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고 합니다. 유다가 먼저 올라간 이유로 첫 번째 생각해야 볼 것은 눈은 눈으로 갚으라는 율법을 생각해 보면 레위 지파 사람들이 가서 이들이 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레위 지파의 첩이 유다지파의 소속이기에 유다지파가 올라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사기 1:1에 보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유다 지파가 가정 먼저 갑니다.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가 가장 큰 지파이고, 그리스도가 나옵니다. 그러기에 모든 지파보다 유다지파는 앞장섭니다.

 

(삿 20:21)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하나님께서 유다지파에게 앞장서라고 하였는데, 베냐민 지파에게 패배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용기를 내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묻습니다.

 

(삿 20:23)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서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25절을 보면 하나님이 올라가라고 하여 올라가니, 이스라엘 자손이 땅이 엎드려 집니다. 두 번째 싸움에서도 이스라엘이 패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26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스스로 용기를 내지 않습니다.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벧엘로 올라갑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단이 있는 곳입니다. 벧엘에 앉아서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내 손에 붙이리라’ 말씀합니다. 첫 번째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기길 치라고 합니다. 두 번째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치라고 하빈다. 마지막에는 ‘내가’ 그를 칠 것이라고 합니다. 내 손에 붙이리라. 전쟁의 양태가 달라집니다. 세 번째 전쟁에서는 하나님께서 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독특한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총회의 잘못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다시 말하면 사적인 분노와 감정에 대한 징계를 하나님께서 내리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는 일에 대해서 어떠한지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들을 철저하게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길 수 있는 전쟁인데 완벽하게 패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를 보게 되면 아이성 전투에서 패한 후 하나님 앞에서 바짝 엎드렸던 모습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사십 만 명의 군사로 인하여 의기양양했습니다. 베냐민이 끔쩍도 안하고 베냐민에 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교만함을 깨달았습니다. 두 번째는 원망의 눈물이라면 세 번째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두 번째는 스스로 용기를 내어 원통하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는 그들이 철저하게 회개하는 자였습니다.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내가 그들을 붙일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베냐민 지파는 두 번의 전쟁을 이겼기에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세 번째 전쟁에서 하나님은 몰살 시킵니다. 두 백성에 대한 징계가 정직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싸움에 대해서 징계하시고, 죄에 대해서 정확히 심판하십니다. 한 종족 간에 일어난 하나님의 일하심이 분명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 끔찍하게 나타나는 것은 자기 소견대로 한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이 죄악이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자기 소견에 이르게 된 공동체와 신앙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자기 소견대로 옳은 대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 없이 결정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위기를 가져오게 되고,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생각해야 볼 것은 사람이 어떤 일을 행할 지라도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정확하고 정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법대로 살아야합니다. 노회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고소를 하였습니다. 그 고소가 개인이 한 것입니다. 올라온 고소에 대해서 공방이 오고갔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해되지 않아,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성경에 두 세 사람의 고소가 없이는 받을 수 없다고 하는데, 이 한사람의 고소를 받으셨습니까?’ 답이 재미있었습니다. ‘그건 성경에 있는 것이고 법은 고소 사건이 이기에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법에는 한 사람이 고소해도 됩니다.’ 성경이 위입니까? 법이 위입니까? 사람이 만든 법이 성경 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정해져 있으면 법은 그 아래입니다. 그러니 노회가 엉망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섰으면 싸움이 일어날 수 없는데, 노회가 싸움이 일어난 것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니 싸우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러니 잘못했다고 하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 소견대로 행하니 위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 소견대로 옳은 대로 행동하게 되면,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이 임합니다. 이 심판은 자기 소견대로 행한 둘 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정직하게 이루어집니다. 베냐민과 이스라엘 둘 다 패하였습니다. 하나님만 승리자 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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