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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16) - 사사기[30] 박석화 201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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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사사기21:1-25)

 

 

사사기 21장

 

오늘 사사기 마지막 장입니다. 사사기 21장에서도 동일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말씀은 사사기 전체의 주제이기도 하면서, 사사기 전체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21장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21장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으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만 보게 됩니다. 마지막 절에 있는 것처럼 사람이 각기 자기 옳은 대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푯대 없이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대변하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동일하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본문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갔을 때의 모습이 얼마나 처참하고 부끄러운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과 교회 밖에 있는 사람 둘 다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교회 안에 있다는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살아가지 않기에 자신이 법이 되어 자기 소견대로 살아갑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사기 21장을 보면서 우리는 어떠한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본문은 25절로 되어 있습니다. 1-7절은 베냐민 지파의 상실에 대한 이스라엘 총회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베냐민 지파의 잘못에 대하여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가 미스바에 모여서 총회의 열고, 베냐민 지파를 멸하고자 결의합니다. 이 총회의 결정으로 인하여 많은 베냐민 지파를 도륙하게 됩니다.

 

(삿 20:48)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마다 다 불살랐더라

 

남은 군사들은 전쟁터에서 살해하고 난 뒤에 이스라엘 백성이 베냐민 성읍을 없애는 엄청난 일을 한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 전체를 없애는 엄청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형제인 베냐민 지파에게 자신의 분으로 인하여 이러한 일을 합니다. 그런데 뒤돌아보니 자신의 형제로 함께 했던 베냐민 지파가 사라지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이 기가 막힌 상황을 보고 총회에 모여서 통곡을 합니다. 우리의 한 지파가 사라진 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그래서 그들은 다시금 베냐민 지파와 싸움할 때 하나님께 회개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던 모습 그대로 베냐민 지파가 사라진 상황에서 번제와 화목제로 회개의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2-4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뒤 5-7절을 보면 지파가 사라질 상황 가운데 처하였지만 어찌할 방도를 내놓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 총회에서 결의하기를 우리 중에 누구도 베냐민 지파를 도와주어서는 안 된다고 서원했기 때문입니다. 베냐민 지파를 돕는 자에게는 진멸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했기에 나머지 지파들은 베냐민 지파를 도울 수 없으니 통곡만 남은 것입니다. 지파를 살리기 위해서는 베냐민 지파에게 다른 지파에게 딸들을 주어서 자식을 낳게 해야 하는데, 총회에서 결의한 것으로 인해 딸을 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서 자책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총회에서 보여주었던 모습니다. 8-12절인데, 두 번째 총회에서 두 가지를 다루는데 어떻게 베냐민 지파를 살릴 수 있을까가 첫 번째 논의 되었다면, 두 번째는 함께 참여하지 않은 족속은 누구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총회에서 결의하기를 모든 지파들이 한 뜻과 마음으로 함께 베냐민 지파를 치자고 하였고, 그것에 함께 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징계를 내리자고 결의 하였습니다. 이 중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족속이 있었습니다. 그 족속은 야베스 길르앗 족속입니다. 백성들윽 계수할 때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총회에 아예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눈에 띄었겠지요. 그러자 그들이 결의한 대로 총회에서 함께 하지 않은 족속은 반드시 형벌을 내릴 것이라는 결의에 따라서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을 치러 보냅니다. 10절을 보면, 회중의 큰 용사 일만 이천을 야베스 길르앗으로 보내서 거민과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로 칩니다. 거민이라고 하면 보통 남자들을 말합니다. 부녀는 여인을 말하고, 어린아이 다 도륙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남자와 약혼했든 결혼하였든 남자와 관계하였던 모든 여인은 죽입니다. 그런데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들만 남깁니다. 400명 정도 남깁니다. 세 번째 결의 사항을 합니다. 400명을 베냐민에게 주자는 것입니다. 베냐민에게 야베스 길르앗 족속의 400명을 주고, 베냐민 지파를 재건하자고 하며, 베냐민 지파와 평화 선언을 합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평화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침범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삿 21:18)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400명을 주었는데, 모자라니까 이에 대하여 어떻게 할까 논의 하였는데 답이 없는 것입니다. 400명은 턱도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베냐민의 사람들에게는 더 필요한데,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총회에서 서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서원한 것은 지켜야 하기에 어길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네 번째 결의를 합니다. 실로의 여인을 아내로 삼을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19-24절까지 내용입니다.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절기가 있습니다. 절기 때 여인들이 나왔을 때 춤을 추는데, 이스라엘 절기 중에서 춤을 출 수 있는 절기는 초막절입니다. 초막절 절기에 실로의 여인들이 나와서 춤을 추면, 실로는 예루살렘으로 30km 떨어진 것입니다. 이 지역에서 춤추는 처녀들을 우리식으로 이야기하면 우리식으로 하면 보쌈입니다. 무조건 데리고 와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이는 레위의 첩이 베냐민 사람들에 의해서 강간을 당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춤추는 여인을 데리고 가서 아내를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장로들이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삿 21:22) 만일 그 아비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쟁론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

 

이렇게 실로의 여인들이 베냐민의 집에 가서 사는 것을 허용합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가 살아남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살아남는 것은 재미있는 구조입니다. 베냐민 지파에서 사울이 나옵니다. 사울 왕은 길르앗 야베스를 위해 일을 합니다. 베냐민 지파는 살아나서 역사의 한 동인을 나타납니다. 그러고 난 뒤 25절에 사사기 전체의 주제인 말로 마무리 합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는 21장부터 행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한 것을 보면 자기의 편리한 수단대로 일을 진행하였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분명한 한 가지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리석고 섣부른 결정은 통곡하게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지혜롭지 않고 미숙한 상태로 결정하면 그 결과는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삿 21:2)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대성 통곡하여

(삿 21:3) 가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 하더니

 

잘 보게 되면,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간구할 내용입니까? 이스라엘 총회가 성급하게 지혜롭지 못하게 결정하였기 때문에 결과입니다. 베냐민 지파가 잘못한 것이 맞지만, 잘못한 일에 대해서 이스라엘 총회가 결정한 일은 너무 성급하였고, 매우 비윤리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지난주에 보았듯이 얼마나 잔인하고 성급합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해서 허용하였지만, 이들이 한 태도는 도를 넘어갔습니다. 결국 이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큰 슬픔입니다. 메튜 헨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명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잘한 일 가운데서도 지나치게 한 일이 있을 수 있다. 대의명분은 하나님의 뜻이었으나, 결과는 몰인정한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기에, 하나님의 뜻을 진행하면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 것이 잘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치라는 명령에 그들은 넘지 말라는 선까지 넘어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통곡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여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행동하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한테 말하지 마라. 확신하니까 건들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의명분은 분명하였지만 몰인정하였습니다. 신약적 표현으로 하면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는 것이 됩니다. 행17장을 보면 아테네에서 바울은 수많은 우상들을 보았습니다. 우상을 보니 바울은 격분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바울이 한 것은 그 앞에 있는 우상들을 칼로 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격분한 것을 가지고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보니 종교성이 많은 것 같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절하는 너희를 본다. 내가 참된 신을 알게 해 주겠다. 토론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물론 아테네에서는 매우 적은 자의 회심자만 얻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일입니다. 다종교 사회에서 분명히 우상은 징계로 없애야 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믿는 자에 안에서 생기는 우상은 없애야 하지만,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행한 바울의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는 태도였습니다. 우상은 분명한 태도이지만, 그 일에 대해서 과격하고 몰인정하고 잔인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잘 통제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매튜 헨리는 두 번째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반드시 처벌해야 함에도 동정심을 가지고 해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벌하시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세 번째는 강렬한 격분은 후회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화가 나가 했던 말과 행동은 후에 냉정하게 생각하여 보면, 나오는 데로 이야기 하고 뒤돌아서서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미스바 총회에 모였던 이스라엘 태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대의명분이 있었지만 몰인정하게 행동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고, 반드시 시행되어야 할 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없이 행하는 것은 역시 하나님의 뜻에 벗어났고, 강렬한 격분으로 일하므로 후회를 낳고 그 역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장면에 왜 이러한 모습이 있었을까? 하고 우리는 고민을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도 이렇게 성급하고 지혜롭지 못하게 행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뜻이 사라진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지 않는 곳에 하나님의 뜻이 없는 곳에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곳에는 영적 유린과 타락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지 않는 곳에는 반드시 영적이고 도덕적 타락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성급한 결정으로 한 지파를 몰살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들은 이렇게 행한 이후에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보니, 자신들이 몰인정하고 무정했음을 보는 것입니다. 황당한 상황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후 이 사람들이 취한 태도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형제 지파를 살리자고 해서 모인 총회는 결의의 모임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황당한 일입니다. 우리는 서원하였으니 줄 수 없다. 매우 신앙고백적인 모습입니다. 이 자체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신앙이 좋은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고 난 후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 대한 태도를 보면 총회에 올라오지 않았다는 사실로 다 전멸해 버립니다.. 매우 몰인정합니다. 못 올라온 이유가 있을 텐데,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올라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이스라엘 백성이 시행한 것은 다 용사를 보내어 진멸한 것입니다. 하나도 거기 없을 보았음이라는 표현은 총회로 올라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의지적 결의가 있었겠지요. 총회의 결의를 무시했기에 징계가 가능하지만, 그 징계가 얼마나 무시합니다. 지파를 없어지는 것을 걱정한 사람이 한 족속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야베스 길르앗 사람을 진멸하고 400명을 베냐민 사람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실로 있는 처녀 200명을 보냅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는 이어갑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겠는가? 얼마나 황당합니까? 자신들은 서원을 지키기 위해서 총회에 보내지 않으나 총회에 함께 하지 않은 지파를 몰살하여 여인을 보내고, 모자라는 것은 여인을 데리고 와 아내를 삼키게 허락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총회에 그런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용서하여 주겠다. 너희가 자의로 하지 않았으니, 죄가 없다고 판결도 합니다. 본인들도 죄가 없다고 판결을 냅니다. 이 장면을 보면 웃기는 장면입니다. 한 지파를 구하기 위하여 다른 지파를 구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강간당한 여인으로 인하여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제는 집단 강간을 허용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입니까?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보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떠한 일이드니 하나님의 일은 성급하게 결정하면 안 됩니다. 격장된 상태나 흥분된 상태에서 결정하면 후회를 낳게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매우 신중하고 진중한 모습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기준은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총회가 결정한 것을 보면 상황적으로는 옳습니다. 여자가 있어야 하는데, 서원한 이스라엘 백성을 할 수 없으니, 올라오지 않은 족속과 다른 족속에서 600명을 채우겠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옳습니다. 쉽고 펴하게 결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은 환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물었어야 합니다. 20과 21장의 차이를 아셔야 합니다. 20장에서는 베냐민 지파를 치러 갈 때는 이스라엘 총회는 하나님께 세 번이나 물어봅니다. 전쟁이 끝나니 이들이 그런 하나님께 묻는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긴 자답게 교만한 모습이 풍기는 것을 봅니다. 마음껏 자신이 정해서 사람을 살립니다. 지파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 손에 있는 것이지 사람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냐민 지파가 살아난 것은 구속사적으로 하나님 손이 일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합리화 될 수 없습니다.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기준 됨이 무너지면 영적, 도덕적 타락은 불 보듯 뻔하게 다가옵니다. 그럴듯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거기에는 반드시 추악한 타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그러니 윤리적으로 타락하여 잔인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합리화 시켜서 일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모습에도 이러한 모습을 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생각과 기준과 다르게 막 나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가하는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굴복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생각들이 하나님의 뜻에 비춰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통곡을 하였는데, 이들이 한 것은 자신들의 방법이었습니다. 이 모습 안에 하나님과 소통하는 모습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 윤리적 타락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타락은 윤리적 타락을 가지고 옵니다. 영적으로 타락은 윤리적 타락은 반드시 동시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기준 됨이 무너지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 이런 불의함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것은 늘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는 지식 가운데 자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자라난다는 것은 하나님 뜻을 묻는 훈련이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 가운데 나의 길 가운데 영적 여정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자기 소견대로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 가운데 살면서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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