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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17) - 룻기[1] 박석화 2014-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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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룻기1:1~18)

룻기 1장


우리가 읽은 룻기는 1장 1절을 통하여 어떠한 시대에 어떠한 환경 가운데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사기를 치리하던 때라는 것을 볼 때, 룻기는 사시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사사시대 가운데 흉년이 든 때입니다. 사사시대는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대로 행하였던 시대에 자연 환경으로 흉년까지 들었습니다. 얼마나 힘든 때가 되었겠습니까? 사람들이 살기 힘들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유다 베들레헴 한 사람이 그 땅을 떠나 이민을 갑니다. 살기 힘드니 이민을 가게 된 것입니다. 내가 사는 곳이 편하면 이민 갈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상황이 어렵고 힘들면 그 상황을 새롭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근데 어려운 상황은 예견하지 않고 옵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 가운데 위기는 찾아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처하는 반응은 다양합니다. 첫 번째 반응은 세상을 원망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그리고 고민하겠지요. 그리고 이 땅에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면 떠나게 됩니다.

이 첫 번째 유형은 자기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원망을 표출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사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시간입니다. 시간뿐만 아니라 시간 이후의 삶의 다양한 경험들은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고생 종류에 따라 다릅니다. 고생 그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어떠한 고생을 하는 것에 따라 나중에 다른 결과를 얻게 됩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이 첫 번째 반응입니다. 치료차 중국에 갔을 때, 18년 전에 중국에 갔을 때 교민이 30명이었는데, 그런데 지금 광주의 교인이 3만 명이 넘습니다. 그 교호에서 처음에는 18명이 예배를 드렸는데, 지금은 1500명 정도가 예배를 드립니다. 물론 광주는 우리의 독립 운동에서 중요한 곳입니다. 중국 광주는 황포 군관 학교가 있었던 곳입니다. 3만 명이라는 사람이 고향을 등지고 온 것은 이 땅에서 어려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제 친구도 여기서는 힘들었는데, 광주에서 잘 자리를 잡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광주는 84층이 제일 높은 빌딩이었는데, 지금은 100층 넘는 빌딩이 지어졌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찾아갔듯이 지금은 엄청난 사람들이 중국이라는 땅을 찾아가서 자신의 새로운 삶의 모습을 세우려고 합니다. 대부분 첫 번째 사람들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봅니다. 혹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를 돌아봅니다. 하나님께 돌이켜 회개를 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왜 하나님이 어렵고 힘든 상황을 주셨는지에 대해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반응합니다. 위기가 오면 사람들이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우리나라도 세월호라는 위기를 겪고 나니, 여러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이를 두 가지로 추려 볼 수 있습니다. 상황에 대하여 돌아보는 사람이 있고,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자 마자 들은 기사가 목사의 망언이라는 말을 들으니 씁쓸합니다. 반면에 한 부류에서는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은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은 상황을 원망하고 상황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떠한 상황이든지 자신을 돌아보라고 이러한 상황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보라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 가운데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저 역시 교회 앞에 서서 질문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을 우리에게 주셨을까? 상황과 환경을 놓고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뜻이 있습니다. 알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룻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룻기는 장차 우리에게 올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룻이라고 하는 여인은 예수님의 조상입니다. 이 룻은 이방인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 여인의 가족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앞으로 보겠습니다. 요한복은 1장 12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람이나 육정이나 아니라 하나님으로 이루어진다. 왜 하나님께서는 룻을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삼으셨는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여인을 통하여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특권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뜻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구해야 합니다. 왜 이러한 상황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이 질문을 하고 바른 답을 얻어야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뜻과 육정으로 생각하고 살게 됩니다. 우리는 육적으로 혈통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육적으로 생각한 다는 것을 계산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효율성을 생각합니다. 효율성이 맞게끔 일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모습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여인 룻을 택할 때 이 여인을 택할 때 효율성이 있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혈통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좋은 가문입니다. 이스라엘 같은 유대인의 가문일까요? 오늘 우리식으로 말하면 돈 있는 사람, 돈 없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룻을 택하여 예수님의 조상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룻은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룻기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놀라는 것입니다. 룻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누구에나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황 가운데 우리에게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룻기는 사사 시대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 사실을 기록한 것은 룻기가 소설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호랑이 담배피웠던 시대의 일이 아닙니다. 사사 시대에 흉년이 일어날 때의 일입니다. 주인공이 나옵니다. 유대 사람이 집을 떠나서 모압으로 간 것입니다. 정확히 역사의 사실을 그려놓은 것입니다. 룻기는 이방 여인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룻은 그리스도의 조상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15절에 보면 인장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룻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사시대의 룻의 이름을 그리스도의 시대에 보게 되고, 여전히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룻이라고 하는 한 이방의 여인의 이름이 이스라엘 전 역사의 흐름 가운데 흘러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시대에 흘러왔고, 오고 오는 시대 가운데 주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그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도대체 룻이라는 여인이 어떠하기에 축복을 받게 된 것일까? 누구도 지울 수 없습니다. 지우는 것이 불가능 합니다. 룻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지워내도 그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룻기를 구속사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의 관점, 구속사의 관점, 평범한 일 가운데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가는 것을 이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여인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셨습니다. 엄청난 일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룻이라는 여인 이름 가운데 엄청난 역사가 기록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어마어마한 역사의 주인공인 룻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룻의 일생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 지를 배워야 합니다. 이제 주님오시는 그날을 예비하는 우리가 무엇을 준비하고 알아야 하는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4장밖에 안 되는 짧은 룻기가 구속사의 큰 흐름 가운데 없어서는 안 될, 구속사의 흐름에서 없어서 안 될 것으로 룻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14절까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구조는 1-2절을 보면 나오미의 가정이 모압 지방으로 이전하게 된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일입니다. 3-5절은 슬픈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3명의 과부만 남게 됩니다. 잘 먹고 잘 살려고 갔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되었을 때 비참할 것입니다. 잘되는 사람보다 못 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이민 사회입니다. 중국 광주는 지금 우기 마지막이라고 하루에 수시로 비가오고 습도가 엄청 높았습니다. 일주일 전에는 흰 개미떼가 습격을 했다고 했습니다. 돈 벌려고 가고, 성공하고 나은 삶을 살려고 갔는데 실패를 당하면 끔찍합니다. 6-7절은 우리가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을 봅니다. 8-13절 말씀을 보면 이러한 상황이 되자 자부 두 사람을 자기 백성에게 돌려보내려 권고하는 상황이 나옵니다. 너희 집으로 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14-18절은 두 자부 중 한 사람 오르바는 떠나고 롯은 남게 됩니다. 15절 부터는 다음 주에 살펴보겠습니다. 왜 오르바는 떠나고 롯을 남게 되었는가를 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펴볼 18절까지의 내용입니다. 18절부터 마지막 까지는 나오미와 룻이 고향땅 이스라엘을 돌아가게 됩니다.

오늘 14절까지 본다면,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정이 나타난 모습들, 그들의 불행한 가족사, 그리고 돌아가려고 하는 그들의 결정, 첫 번째는 가족이 죽음으로 흩어지고  이별하게 됩니다. 가정에 큰 위기가 다가온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인생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무엇을 선택하여야 하는 지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엘리멜렉과 가족에게 온 기근은 숙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에 다 기근이 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다 모압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만 떠난 것입니다. 오늘날 경제적인 이유로 대한민국을 떠나 중국 광주로 가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이 이스라엘을 떠나 모압으로 가는 것은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땅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그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조금 어렵고 힘들자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고향을 떠나게 됩니다.위기의 상황에서 어떠한 결정을 해야하는 지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멜렉의 말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왕입니다. 이름에서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없겠지만, 그 왕의 선물인 가나안 땅을 버리고 만 것입니다. 엘리멜렉은 하나님의 왕이십니다 라는 이름에 걸 맞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나의 피난처와 산성이시라, 하나님의 내가 무엇을 하든지 함께 하신다. 내가 앉든지 일어서든지 나의 모든 것을 아신다. 그는 선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갈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간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엘리멜렉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라는 고백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는 불평합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것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가난을 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자녀가 못 먹는 것을 보는 것은 미치는 일입니다. 가난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가난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 올 수 있는 일이지만, 쉽게 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 올 수 있는 일이지만 쉽게 말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 가져야할 자세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죽으면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들은 여호와는 나의 왕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이 살려고 하나님의 땅을 떠난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 면류관은 없습니다. 그 나라가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약속의 땅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목사의 가장 큰 행복은 강대상에서 설교하다가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위기 14장을 보면 기근은 하나님의 심판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는 죄를 지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맞이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심판에서 도망간 것입니다. 약속을 주신 땅에서 고난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보아야 합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예배의 자리를 떠나면 회복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육신적인 회복은 가능해도 영적인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기도하며 입술에서 찬양이 있고, 주의 말씀을 듣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비로소 여기서 영적인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능력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하나님의 심판의 일을 잘 살피고 하나님 앞에서 돌이켜야 했습니다. 그러기 싫으니 모압으로 간 것입니다. 모압은 그모스라는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모스는 풍년의 신입니다. 하나님이 기근을 주었는데, 사람들이 보기에 그런 것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 풍요롭게 보이는 것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나의 피난처라고 고백한다면 내가 있는 상황과 관계없이 진정으로 피난처가 됩니다. 그모스라는 풍년의 신이 보기에 좋으니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풍요로움은 참된 풍년이 아니라 우리를 현혹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나아가고 기도하고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힘들 때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게 되었고, 하나님이 옳게 인도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여 주신 것을 보면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 예배하는 자리를 사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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