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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18) - 룻기[2] 박석화 2014-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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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룻기1:1-18)

룻기 1장

  우리는 지난 시간에 룻기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룻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위기에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가에 대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람마다 상황과 처지는 다르지만 인생의 위기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최근 여러 공방 가운데서 있는 국무총리 후보자 내정자에게 위기가 왔습니다. 사람을 살아가면서 보수적인 생각을 할 수 있고, 진보적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진보적인 생각이 다 옳은 것이 아니고, 보수적인 생각이 다 틀린 것이 아니고, 보수적인 생각이 다 옳은 것이 아니고, 진보적인 생각이 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오묘한 섭리 가운데 100% 확답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여론과 소리와 군중에 함성의 소리에 이리저리 흘러갑니다. 국무 총리의 내정자의 강연을 읽어 보변서 실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을 매장할 만큼 실수인가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았습니다. 국가의 중요한 리더자가 되는 사람은 점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철회하고서라도 그 사람에는 위기가 온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위기가 옵니다. 작은 부분에서 위기가 없는다. 저한테도 몸이 탈진 되면서 위기가 왔습니다. 위기 가운데 어떠한 모습을 가질까요? 첫째는 절망할 것입니다. 둘째는 타협할 것입니다. 불의와 부정과 세상과 타협할 것입니다. 셋째는 위기를 이기고자 싸우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 가운데 우리는 존재합니다. 그리스도는 절망하거나 세상에 타협하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세상의 위기 가운데 싸우는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를 보면 한결같이 위기 가운데 산성이고 바위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위기를 이기고 가는 것을 봅니다. 시편 가지 가슴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망이 위기를 극복하고 위기가 새로운 기회가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다. 룻기를 보면서 우리가 이와 같은 것을 봅니다. 룻이라는 여인을 보면서 이를 보게 됩니다.

  그녀는 위기가 왔습니다. 룻의 남편이 죽었습니다. 이 상황 가운데 시어머니는 자기를 버리면서 자기의 땅으로 가라고 합니다. 나오미와 엘리멜렉을 보면 그들의 위기가 처했을 때, 약속의 땅에 있지 않고 상황을 피하여 애굽으로 갔습니다. 애굽으로 가서도 위기를 맞이한 여인의 모습을 룻기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도피하였던 이들에게 이방의 땅에서 물질과 다른 힘든 위가를 어려움을 당하게 되고, 어려움 가운데 어떻게 해야 할까? 위기 가운데 어떻게 해야 할까? 를 보여줍니다. 나오미와 룻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전반적인 첫 번째 내용입니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우리 삶에는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고통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고통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기근을 피하여 모압으로 간 엘리멜렉은 모압 여인을 아내로 삼습니다. 결혼했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과 가정을 기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이러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며느리를 얻은 이후에 시아버지가 죽고, 두 아들이 죽게 됩니다.
말론과 기룐이 죽게 됩니다. 이들에게 자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상황인 것이 분명합니다. 졸지에 세 명의 과부가 생겨난 것입니다. 기대를 가지고 새로운 땅, 꿈을 쫓아 간 땅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두 자부는 둘째 치고라도 시어마니 나오미는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있냐고 한탄하지 않을 상황이 온 것입니다. 어려워서 굶어 죽지 않아서 갔는데, 죽게 된 것입니다. 살려고 간 땅에서 죽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 입장에서는 기가 막힌 것입니다. 거기다가 두 아들은 죽고 남은 것은 자부인데, 이방 여인입니다. 이것도 나오미에게는 기가 막힌 것입니다. 이방 여인 둘 만 남은 상황이 된 나오미입니다. 우리 나라 상황에서는 잘 되면 아들 탓이고 못되면 며느리 탓을 하는 것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 입장에서 기가 막힌 상황이 주어진 것입니다. 나오미가 이러한 고난을 기대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오미가 새로운 생명을 찾고 복을 누리고 갔던 땅에서 일어나서 안 된 일을 겪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오미에게는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가정에 일어난 것입니다.

  나오미와 엘리멜렉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서 우리 역시 비슷한 일을 겪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남 이야기 같지 않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고통과 고난이 올 수 있습니다. 욥이 그러하였습니다. 욥이 고난을 생각했겠습니까? 그는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동방의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닥쳐온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욥의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였습니다. 뜻하지 않은 상황은 하나님이 허용하신 고난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잘 알지 못하지만 우리도 이러한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번에 총리 후보자의 연설때문에 소란이 많았습니다. 그가 실수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결정론으로 몰아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다마 우리라 할 수 있는 것은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있었음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꽤 긴 강연이었지만 끝까지 읽었습니다. 그 강연을 보면서 생각해 보면서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고난을 당하였을 때 왜 이런 상황을 주셨는지 배워야 합니다.

이번의 총부 후보자에 대한 논쟁은 그가 일제 침략은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말한 것과 일본 때문에 근대화가 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반대하는 분들은 일제 시대에 투쟁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반역한 것인가?라고 반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독교 세계관으로 역사를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하는 분들이 정말 기독교 세계관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민족 사관에 입각해서 총리 후보자의 글을 보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총리 후보자가 식민 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확실하고, 성경적 세계관으로 볼 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연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선택된 백성에게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을 준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만 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하러 구약 성경을 봅니까? 성경은 모든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이스라엘 의 선택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어떻게 인도하여 가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에 보면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강한 자들의 불의함에 대하여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철저하게 타락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권력을 가진자들은 우상숭배를 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학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데, 저들을 어떻게 가만히 둡니까? 그렇게 탄우너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대답합니다. 내가 열방을 일으키리라,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징계하리라. 이방 나라를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징계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선지자가 이해가 안가고 기가 막힌 것입니다.  선한 사람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친다면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조폭을 들어서  백성을 칩니까? 이스라엘은 물론 악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더 악한 이방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칠 수 있냐고 묻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맞습니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다시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말합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때가 이르면 그들을 바벨론을 징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유명한 하박국 2:4절의 말씀이 나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의 의가 드러날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드러날 일들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오늘을 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의하여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갑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심판한다고 하였습니다. 포로로 잡혀갈 때 저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항하니까 심판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끝내지 아니하시고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끊임없이 선지자를 보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각성시킵니다. 자신들이 죄를 돌이키고 다시금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로 돌아오도록 준비시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이 있습니다. 일제 36년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제 36년을 통하여 한국 교회의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신사참배가 이루어졌습니다.그리고 이러한 추악하고 더러운 것과 싸우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교회의 불의함에 저항하고 더 큰 죄를 가진 일본에 저항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역사 가운데 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들의 불의한 시대를 향하여 우리들의 죄를 기억하고 자백하고 깨어서 각성하는 필요합니다. 불의한 세력들을 향하여 대항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김구와 삼일운동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것입니다. 아니요.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우주에 중립 지대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역사 가운데 일어난 일들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이 땅에 선교사가 왔습니다. 한국에 선교사가 온 것은 하나님의 뜻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역사의 하나님의 섭리가 없는 것이 없습니다. 분명합니다.

  아모스를 보게 되면 이스라엘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은 이방의 모든 나라를 심판합니다. 이방 나라를 다 심판하고 맨 나중에 이스라엘 심판을 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무시한 적이 없습니다. 이방나라는 언약 백성이 아니니 내 손에서 벗어났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이야기 하면 인민재판을 하듯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손이 떠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습니다. 동시에 불의한 자들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욥은 분명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시험을 허용하였습니다. 시험 받은 욥이 저항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역사가 지난 이후에 보니까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은 나오미의 세 명의 아들과 남편이 죽었습니다. 나오미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상황은 분명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상황에 절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일제 36년이라는 고통의 시간을 만들게 된 상황 가운데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가를 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부정과 불의였다고 한다면, 부정과 불의를 회개하고 회복해야 합니다. 부정과 불의의 세력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다면 그들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세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나에게 온 고통을 하나님의 뜻으로 볼 것인가? 만약 숙명으로 받아들이면 숙명론에 빠지게 됩니다. 숙명론에 빠지게 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가에 대한 깊은 의미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상황을 당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되겠는가? 작은 악에 대항해야 하지만, 큰 악에도 대항해야 합니다. 이 상황 가운데 나오미는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압 땅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고통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것에 소망이 없다고 하는 곳에 있습니다. 모압이 소망이 없을 알 때, 고향 이스라엘에 소식이 들린 것입니다.

(룻 1:6)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룻 1:7)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

  놀라운 소식이 들려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기근이 있었던 그 땅에 양식을 주신 것입니다. 이 소식이 멀리 있는 모압에 들려온 것입니다. 나오미가 그 사실을 듣고 결정합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양식이 있어서 돌아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과부 셋이 돌아간다는 것은 온갖 모욕과 치욕이 만 천하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 삶이 패가망신했는데 고향으로 갈 수 있을까요? 고향으로 가는 사람은 금의환향하는 사람입니다. 더러는 마지막에 고향에서 죽겠다는 사람은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버려두고 이방 땅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돌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나오미가 결정을 합니다. 나오미 안에 어떠한 모습이 있었는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드러난 것입니다. 철저히 회개의 자리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있을 곳이 이곳이 아니구나. 나오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작정합니다. 다시금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떠한 상황 가운데 주어졌는지 깨닫고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임을 알게 되고 돌아가게 됩니다.

  결정을 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고난과 고통이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고통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고통과 고난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6절을 보겠습니다.

(룻 1:6)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우리가 모압 지방에 있었지만, 이스라엘 향하여 귀 기울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갈 곳을 결정한 것입니다. 들었다고 하는 것은 자기 안에 분명한 돌이킴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떠나서 어려운 곳을 떠나서 조금 더 쉬운 길을 찾아 이방인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가! 남아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기에 그 땅에서 인내하며 견디는 것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세상과 타협하여 이스라엘을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남은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견딘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 땅에서 그들의 남편과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오미는 알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징계임을 알았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다가 오는 위기와 고난 가운데 쉬운 길로 가서는 안 됩니다. 약속의 땅에 있어야 합니다. 위기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은 채찍질하여 그 자리로 오게 합니다. 인생의 막대기와 채찍질을 맞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위기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나오미와 엘리멜렉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오게 하는 놀라운 일이 있음을 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애굽 땅으로 가는 것을 허용하신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위해서 보낸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엘리멜렉을 죽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행하시는 분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 하였습니다. 거기에서 룻의 존귀한 신앙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허용하셨지만, 하나님의 사람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징계가 임하였지만, 룻의 신앙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허용하셨지만, 하나님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룻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타협한 행위는 악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부인 룻의 아름다운 신앙을 사용하셔서 그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도 같습니다. 타락하였기에 하나님이 징계하셨습니다. 그 징계 가운데 의롭게 살고자 하는 공의롭게 살고자 하는 악한 이들을 대항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이나 일반 역사나 우리 시대에서 보는 역사나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은 우리가 알 수 없으나 주어진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악과 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결코 세상과 타협하여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과 타협하여서는 안 됩니다. 싸워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약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일하시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룻을 어떻게 사용하셨는가를 보게 됩니다. 룻의 의로운 행위로 가면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 가운데 어렵고 힘든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을 요구하십니다. 이 우리의 열심과 열정은 하나님의 씨앗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두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인식하고 기억하며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오지만, 위기를 기회로 삼는 자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입니다. 그 말씀으로 나아가는 자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힘들어도 고난을 회피하지 말고 고난을 이겨내야 합니다. 영적으로 침체하여 떨어질 수 있으나,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약속의 자리에 서서 약속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이후의 역사가 우리를 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다음의 세대에 맡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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