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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19) - 룻기[3] 박석화 2014-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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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룻기1:12-18)

룻기 1장(3)

    계속해서 룻기를 살펴보고 있고, 오늘 세 번째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여정 가운데 딱지와 같이 따라 붙는 것이 있다면 고난입니다. 고난 없이 우리 인생을 말할 수 없습니다. 고난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상위 1%로 태어나서 살고 물질적 행복을 누리고 인생의 거칠 것이 없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아도, 그 안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괴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없다고 한다고 해도 그가 마지막 순간인 죽음 앞에서 고난과 깊은 위기를 있을 것입니다. 인생 가운데 고난은 없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모든 인생에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인에게 더하여 지는 것이 있습니다. 인생 고난과 함께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영적인 위기,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인생들이 있는 고난들과 함께 겪지 않아야 할 이 문제를 반드시 겪게 됩니다. 십자가 없이 우리의 면류관이 없듯이 영적인 고난 없이는 우리는 견고한 신앙의 자리에 서지 못합니다. 영적인 위기가 왔다면 영적인 것으로 해결해야지 육신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어제 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와 대화 가운데 깨달음과 도전이 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려면 여러 가지로 복합적으로 필요하겠지요. 예를 들어서 돈이 없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돈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돈이 주인인가요? 하나님이 주인인가요? 하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돈이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할 때 그 의미를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한다고 할 때, 우리가 고백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선하심이고 하나님의 마음이지 돈이 아니지 않느냐? 그것은 이후에 생각하는 것이 올힞 않겠느냐? 돈이 없어도 하나님의 일이 옳다고 한다면 그것을 감당해야하는 것이 옳지 안 느냐?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때 돈이 준비된다고 한다면 돈을 위해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 말을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일을 한다고 할 때 돈이 준비된다고 한다면 돈을 의지하는 것 아니겠는가? 돈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살면서 우리 실제 삶에서는 돈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아라.

우리가 스펙이 준비되고 돈이 준비되었기에 오늘 우리가 사는 것이냐? 아니면 믿음으로 살다보니 지금까지 온 것이 아니냐? 나의 삶이 돈이 필요했기에 여기까지 왔는가? 돈이 준비가 되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었을까요? 저는 돈이 있었다면 공부했을 것이고 이 자리에 있지 않고 교수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준비시키지 않았습니다.
돈이 없어도 하나님의 일은 여전히 진행됩니다. 만약 돈이 준비되어야 발을 내딛었다고 한다면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공부도 못했을 것입니다. 준비되어야 공부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 생각해보니, 우리의 삶의 과정이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오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앞에 갈 일에 대해서 돈을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기도하세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믿음이 이런 거구나. 위기라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고백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위기는 하나님의 온전한 신뢰인가 아닌가에 대한 것 입니다. 돈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습니다. 믿음으로 갔더니 하나님께서 믿음의 여정을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룻기를 보면서 오늘 이 장면을 보면 분명히 믿게 됩니다. 오늘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과학, 교육, 지식, 경험, 물질을 가지고 있어야 내 삶을 확신 있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는 생각은 교회 밖 사람 뿐 아니라 교회 안의 사람인 우리도 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 있고 하나님을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는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는데, 바라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한 발짝을 띄고 있는가? 주 안에 있으면 분명히 달라야 하는데, 우리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나오미의 귀향에서 나타난 룻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동서인 오르바는 나오미와 함께 하지 않고 자신의 고향인 모압으로 돌아가고, 룻은 자신의 고향이 아닌 타향인 이스라엘로 시어어니를 따라 옵니다. 이런 모습을 통하여 가르치는 하나님의 가르침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삶을 결정할 때가 있습니다. 어떠한 결정을 하든 우리는 반드시 한 번 결정합니다. 결혼할 때도 결정이 있습니다. 직장을 선택할 때, 교회를 선택할 때, 결정을 합니다. 인생은 결정의 연속입니다. 결정 없이 우리의 인생이 진행된 적이 없습니다. 결정을 할 때 우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결정을 하는 가입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내 삶을 결정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를 교회를 중심으로 결정하라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이 나이가 먹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생길수록 이 말이 여려분의 입술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의 결정은 무엇으로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정의 기준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 내 삶에 있어서 결정에서 중요합니다. 룻은 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고향이 아닌 어머니의 고향으로 가는 것을 결정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오미는 이방 나라에 와서 모압에 와서 남편과 아들을 잃은 분명한 인식은 13절에 기록된 것처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어기고 우상을 섬기는 땅으로 갔다. 다시 말하면 세상과 타협하였다. 세속화가 되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나오미의 가족들을 통하여 선명하신 하나님의 을 보여주셨습니다. 끔찍한 남편과 아들이 죽는 사건이지만, 나오미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 이는 엄청난 고백입니다. 나오미는 분명한 신앙 고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마음이 아프다. 룻과 오르바가 잘못한 것이 아니고 내 잘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징계를 받아서 너희들에게 이러한 아픔을 겪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더 이상 오르바와 룻에게 다른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너희는 너희 길을 가라. 이러한  통지앞에 룻과 오르바에게는 중요한 결단의 순간이 온 것입니다. 가라고 합니다.이제는 갈 것인지 남아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시간입니다. 

우선 르바는 시모에게 입맞춤 합니다. 그리고 떠납니다. 룻은 나오미를 붙잡습니다. 떠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말합니다.

(룻 1:15)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너도 오르바처럼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이야기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그 백성과 그 신에게 가라는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우리 옛 말에 재수 옴 붙었다고 합니다. 오르바나 룻의 입장에서는 우리는 모압 사람인데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서 과부가 되었다고 재수 옴 붙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이야기합니다.  그 백성과 그 신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한 이유는 나오미의 다른 장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인하여 자부들에게 어려움이 생긴 것을 보고 자부에게 가라고 합니다. 자신때문에 며느리들이 당하는 고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참된 믿음의 모습을 보게했습니다. 그러자 오르바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의 모습은 다릅니다.

(룻 1:16상)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저 보고 가라고 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 가겠습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기를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고, 16절 하반절에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분명히 룻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분명히 룻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룻에게 신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룻에게 있었기에, 편한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을 택한 것입니다. 

  룻은  어디로 가야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룻의 중심에는 분명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룻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분명한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어머니와 떠나면 내게 벌을 내리고 더 내리실 것입니다. 저는 이미 모압을 등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살아난 사람입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로운 피조물이라. 저는 새로운 존재입니다. 저는 새로운 존재인데, 옛것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살면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에도 옛 것이 주는 것 향수와 그리움에 우리는 흔들리게 됩니다. 새로운 길로 가서 힘들고 고생할 필요 없어. 조금 쉽게 살자. 모압으로 가면 쉽게 살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타향 땅에 살며 고생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기왕이면 자기 고향에서 자기 백성으로 사는 것이 낫지요. 룻은 포기하고 새로운 땅으로 옵니다. 나오미 때문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어떠한 결정을 하게 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등지고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편함을 포기하고 좁은 길을 가기로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재미없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르는 영적인 즐거움과 행복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 주고 살수 없습니다. 따라와야 아는 것입니다. 오르바는 그 진정한 즐거움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고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룻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즐기던 옛 걸을 즐기지 않았습니다. 돌아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룻이 가는 길은 좁은 길이고 힘든 길이지만 그 곳에 참된 기쁨과 행복이 있었던 것을 알았기에 가는 것입니다. 그길이 하나님을 섬기를 길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생각할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환경을 극복하고 요동하지 않는 신앙을 살게 합니다. 환경을 극복하게 하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요동하지 않는 신앙을 가지게 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갖는 적입니다. 미래는 늘 두렵습니다.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앞에 일에 대한 걱정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라. 오늘에 족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걱정은 오지 않는 내일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오늘로 사는 것이지만 내일을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내일을 준비시킵니다. 내일은 어떠한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내일이 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나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내일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 고백이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룻 1:17상)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잘 살려고 하는데, 룻이 무엇이라고 고백 하냐면, 어머니 죽는 곳에 내가 죽어 장사될 것이다. 앞에 잇는 두려움이 있지요.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것입니다. 거기의 사람들이 어떻게 대할지 모릅니다. 마지막 최악은 죽음입니다. 나오미도 고향을 버렸으니 고향에 갔을 때 손가락질 당하고 죽음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룻이 이야기 합니다. 어머니와 함께 죽는다면 죽겠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입니다. 립 서비스가 아닙니다. 어머니를 떠나면 내게 벌을 내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믿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요동치지 않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가는 것이지 환경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이 우리 안에 쌓여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오늘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볼 수 있는 것은 참된 믿음은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열매를 맺습니다. 나오미 역시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며느리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르바가 간 것에 대하여 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룻이 따른다고 하니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나오미와 함께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고향에 갈지라도 나오미가 룻에게 해 줄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나오미는 잘 아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것도 이방 여인을 데리고 왔다? 유대 세계에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각오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무엇이라고 이야기 합니까?


(룻 1:18)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하나님을 만난 믿음. 참된 믿음은 분명한 확신이라는 열매를 보게 됩니다. 나오미에게 룻이 대충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고백이 남아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열매가 있습니다. 정말 믿음의 사람인 것이 드러납니다. 믿음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사람들이 압니다. 믿음이 드러납니다. 돈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 더 있을까요? 사람들이 이런 말합니다. 왜 일합니까? 먹기 위해 일합니다. 다 먹고자 하는 것은 이닙니까? 죽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 있을까요? 죽음을 각오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다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룻의 모습에서 보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룻의 고백을 듣는 순간 룻의 믿음이 분명한 것을 본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통하여 보는 것입니다. 죽음 각오하는 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든든한 믿음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로 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강력한 무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측면에서 이 룻의 교훈을 보며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분명합니다.


    첫 번째는 교훈은 죽음도 그 믿음의 삶을 변질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 주석가는 아브라함보다 룻이 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시라도 받았지만, 룻은 계시를 받지도 않았습니다. 시어머니가는 곳에 가는 것입니다. 그 한 학자에 동의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룻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룻은 옛 것, 가족 친지 다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따라오거든 다버리고 오라고 하셨고, 내 형제와 부모를 사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룻입니다. 룻은 다 등지었습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어떤 것도 나의 믿음을 변질 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이러한 신앙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느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가로되 주여 그러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 말합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동일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5~19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가운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확인한 후 하는 것은 그에게 주신 것은 내 양을 먹이라 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라고 말씀하시고 베드로가 어떠한 죽을 것을 알려 줍니다. 베드로의 분명한 신앙 고백을 보고 어떠한 환경 가운데 흔들리지 않을 것을 아는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그렇게 순교하였습니다.


    또한 룻의 모습을 통하여 볼 수 있는 두 번째 하나님을 향한 고백은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고백하는 사람은 영혼 한 명 한 명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여기서 룻이 대단하게 어머니가 가는 곳에 나도 따라가겠다고 하는 것은 단지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차있기 때문에 시모에 대한 사랑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신앙을 세운 것은 자신의 시모 나오미 때문이었습니다. 시어머니를 통하여 믿음을 전수 받았습니다. 어머니와 신앙을 공유한 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기쁜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입니다. 믿음의 동지를 갖는 것은 복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런 믿음의 동지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다음 대에 동기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가 있었지만, 룻도 자신의 대에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이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람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 하셨습니까? 율법사가 가장 큰 율법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 있는 말씀처럼 먼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이 룻을 통하여 보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룻은 가냘픈 여인고, 이방 여인이지만, 그는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때문에 모든 환경을 이기고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간 하나님의 연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붙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는 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음까지라도 단보할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믿음을 부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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