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성경 연구 (룻기1:19-22)
룻기 1장(4)
오늘 말씀을 생각해보고 기도의 제목을 삼고자 합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삶의 변화가 있을 때 마다 표징들이 나타나는데, 그 중 하나가 이름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새로운 결정을 할 때, 머리를 자른 다든지 옷을 바꾼다든지, 여행을 간다든지 해서 우리의 삶에 다양한 변화를 갖는 것처럼, 성경에서도 삶의 변화가 나타나는 다양한 상징들이 있는데 이 중에 하나가 이름이 바뀌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꾸었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게바가 베드로라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성경에서 삶의 전환점이 있다는 것이고 새로운 삶이 주어졌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름이 바뀜으로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다른 삶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도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사실은 우리도 이름이 새로 바뀐 사람입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러한 삶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을 이렇게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새로운 삶의 자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자세에 대해서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드디어 나오미가 며느리 룻과 함께 자신의 고향의 땅 예루살렘 베들레헴에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 사람이 베들레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이르자 나오미를 아는 많은 사람이 나와서 ‘나오미가 아니냐, 나오미가 아니냐’라고 부릅니다. 그 때 나오미가 그들 앞에서 말하기를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합니다. 더 이상나를 나오미라고 칭하지 말라. 너희가 알고 있던 이전의 나오미라고 생각하지 말아 달라. 나는 이전의 나오미가 아니다. 바뀌었다.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마라에게 된 설명을 했습니다. 이 설명을 룻기 1장 20-22절에서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이름이 바뀌기를 스스로 고대합니다. 나는 나오미가 아닙니다. 나오미라고 하는 이름은 하나님께 즐거움을 받는 자, 나의 즐거운 자. 나의 기쁨 이런 뜻입니다. 이름 안에서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마라라고 하는 것은 쓰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쓴 또는 괴로움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쁘고 즐거운 자가 아니라 쓰고 괴로운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보고자 합니다. 왜 나오미는 이러한 표현을 스스로 하게 되었을까요?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첫 번째로 생각해보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할 때, 또는 인생의 변환 점을 가지게 될 때. 특별히 영적인 변환 점에 서게 될 때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자세 가운데 하나는 자신에 대해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결국은 멸망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일까? 나오미는 나오미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고향을 떠나서 모압 땅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을 당했고, 자신이 어떻게 살았고, 고향으로 돌아왔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베들레헴 사람들은 나오미가 어떠한 모습을 살았는 지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포장하기를 원합니다. 보여주기 싫어합니다. 이전에 있었던 삶은 좋은 것만 이야기합니다. 왕년에 이했다는 말을 합니다. 나는 왕년에 공부를 잘했고, 왕년에 부자였고, 왕년에 잘 생겼다는 말을 합니다. 다들 왕년에 부자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할아버지 때 부자였는데 아버지 때 망해가지고 내가 이렇게 되었다. 정말 그러한 분도 있겠지만, 이러한 이야기 살아오면서 저는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나는 옛날에 백정이었다는 상놈이었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다 포장하는 것입니다. 집안 좋았는데 할아버지가 망해서 혹은 아버지가 알콜 중독자가 되어서 내가 이러한 모습이 되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그렇게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모압에서 나오미가 어떻게 살았는지 이스라엘 가운데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포장하여 이야기 할 수 있었습니다. 때때로 남편과 자녀의 죽음도 포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하였다고 하여도 누구 부정하겠습니까? 모르지 않습니까? 선교자들이 선교사지에 나가면 어떻게 사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입술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다 좋은 소리겠죠. 선교지에 있는 모습을 보면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오미는 자신의 모압 생활에 대해 정직하게 대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나오미라고 하지 말고 마라라 하라. 베들레헴에서 나오미를 아는 사람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미의 실체를 정직하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오미가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할 때 새로운 삶을 비로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이라는 것은 내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고서는 결코 주어지지 못합니다. 신앙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존재로 사는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믿음으로 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행하고 있는 것은 경험과 지식인가? 이것은 주님오실 때까지 끊임없이 분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믿음으로 일을 하지 않고 내 경험과 지식으로 사회생활을 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너무나 비판적으로 보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갈수로 한국 교회가 이런 모습인가, 내 자신은 이런 모습인가를 생각해볼 때 드는 생각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경험과 지식으로 사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외적인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믿음으로 세워지는 교회인가를 생각해보면, 두려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처음 가졌던 뜨거운 믿음과 뜨거운 말씀은 화석화되어지고, 사람이 두려워지고 환경이 두려워지는 상황이 되어진다면 교회로 세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이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지나가게 되면 자신을 정직하게 보지 못하고 포장하여 보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겸손하게 대할 때 겸손하게 보지 않고 깔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겸손했던 사람이 오히려 깔봄에 대한 충격에 대하여 겸손에 자리에 서지 못하고 교만에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하여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으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에서 벗어 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진노로 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는가? 이 은혜를 잊어버리면 육적인 신앙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와 경험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은혜를 주셨고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게 되면 믿음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되면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신앙 생활하게 됩니다. 교회는 지식과 경험과 세속적인 방법으로 나아가면 교회는 교회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두렵고 힘든 모습이 되겠지요. 자신을 대면하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존재인가? 하나님에 대하여 내 가슴 속에 고백을 가지고 있는가? 정말 중요합니다. 정말로 나오미처럼 나오미라고 하지 말고 마라고 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이 아닙니다. 죄인입니다. 나는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별볼 일 없습니다. 나는 잘난 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 대단하겠습니까? 여러분 가지고 있는 지식과 물질들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다 쓰레기와 같은 것입니다. 별로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나오미의 모습을 통하여 보여주는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할 때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지 못하면, 결코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오미의 모습을 통하여 보여주는 첫 번째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는 새로운 삶에 대한 자세를 가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나오미는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하면서 이후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전능자 나를 심히 괴롭게 하였다. 전능자라고 하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능력 있는 자,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자라는 고백입니다. 이 표현은 내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모압에 있든지 예루살렘에 있든지 하나님이 나를 가난하게도 할 수 있고, 부하게도 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중요한 것이죠. 중요한 고백입니다. 전능자가 나를 부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게 하셨다. 나오미에게는 분명한 신앙 고백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이 있었기에 지금 나의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 자신이 괴롭게 되고 힘들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자신은 스스로 엘리멜렉과 함께 모압으로 떠나는 결정을 했습니다. 가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죄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가르침과 뜻하심을 어기고 모압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진노가 따라오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상황 가운데 자신의 분명한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심히 괴롭게 하였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괴롭게 하셨을까?
(룻 1: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던 내가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부하게도 하고 가난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풍족하게 하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가난하게 하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나오미는 엘리멜렉과 함께 풍족한 삶을 살고 싶어서 떠났습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 모두 부자가 되고 싶지요. 우리 모두 높은 자리에 있고 싶지요. 인정받는 사람되고 싶어서 열심히 세상으로 가서 노력하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 있는 것처럼 풍족하게 나아갑니다. 우리 모든 삶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 풍족한 삶을 원했는데, 결국 텅텅 빈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내가 세상의 능력과 실력을 통하여서 좋은 자리에 오르고 그에 걸맞는 부를 얻기도 하고 명예를 얻기도 합니다. 목에 힘이 들어가지고 하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들을 볼 때 우습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텅텅 빈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재능과 능력과 실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실력이 좋다고 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가소롭죠. 한심하죠. 그런데 마치 우리는 대단한 것처럼 우시하며 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더 풍족한 삶을 살고자 해서 나갔지만, 결국 비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나를 비게 하셨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일단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나오미는 철저하게 엘리멜렉과 갔던 모든 상황전제하여 생각하여 볼 때, 나오미는 하나님께 얼마나 불충을 행하였는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불충을 행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범죄 하였기에 징계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속적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징계했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라라고 하는 이름을 갖는 것이 합당하고 합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오미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징계 했는데, 여러분이 나를 나오미라고 부른다면 그것이 가당한 이야기입니까? 다시 말한다면, 하나님의 섭리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범죄하였고 징계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든 일일 생길 때 아픔을 생길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일을 잘 살펴야 합니다. 내 죄로 인한 징계가 상당히 많습니다. 고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스스로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고 우리의 삶을 보면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을 향한 범죄를 인한 징계를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징계에 대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이렇게 하셨다는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을 하지 못하니,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일이 매우 더디어 지는 것입니다. 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는 일이 있는데, 그 일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오미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순종하였기에 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징계는 합당한 것이고, 나오미로 칭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고 마라라 칭하는 것이 합니다. 나는 괴로운 존재입니다. 왜요? 나는 언약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이런 고백만 가질 수 있어도 하나님의 은헤 받은 자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잘 나갈 때가 아니라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신 자도 여호와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요 모든 것을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하나님의 일하심에 고백을 해야 합니다. 잘 나갈 때 감사하는 것 필요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 동일하게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은혜 받은 자의 모습이요. 새로운 삶의 사늦 자의 자세입니다. 그리tm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하면,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순종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순간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원망하고 한탄합니다. 스스로를 망친 인생으로 몰고 갑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이러한 모습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오미는 철저하게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세 번째로 새로운 삶의 대한 자세는 겸손함입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멋진 표현은 겸손입니다. 겸손에서 시작될 때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형식화되지 않고 외식적이고 않고 순결하게 나타납니다. 겸손이 없이는 사랑과 자비함은 대부분 외식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기브 앤 테이크와 같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나오미를 보십시오.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마세요. 여러분 생각하여 보세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 쉬운 것 아닙니다. 자신이 낮출 때 상대방은 그것을 이용해서 깔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말에 이런 말이 있지요. 잘 대해주었더니 기어오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자리를 잘 지킬 수 있어야 하는데, 동등되게 행동하는 것이 많죠. 겸손하고 따뜻하게 대하였는데 기어올라서 자신과 똑같은 태도로 대하는 것,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 아닙니까! 모든 것은 감당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어렵고 힘든 것입니다. 나오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자신을 땅 바닥으로 내립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다른 사람 앞에서 땅 바닥까지 내려앉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겸손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 중 하나가 청빈입니다. 겸손할 때 청빈한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성공하면 기쁘죠? 성공하지 않으면 기쁘지 않습니까? 성공 하는 것과 성공하지 않는 것은 세상의 기준이죠? 그 아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지 못하면 심장을 찍고 피를 토해내야 합니다. 자녀가 돈을 많이 벌어오는 것에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종이 쪼가리에 희희낙락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거듭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벌어 지옥가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런 부모는 지옥가라고 불붙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도 동일합니다. 돈을 많이 벌었느냐? 못 벌었느냐? 권력을 가졌느냐? 갖지 못했느냐? 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지는 가입니다. 내 자신을 내리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 오실 때까지 분투하고 싸워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낮아진다고 해서 불의에 대해서 외면하거나 모른 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에서 돈을 파는 상을 엎었습니다. 거룩한 분노가 죄에 대해서는 있어야 합니다. 죄가 아닌 것에 대해서 겸손해야 합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알았기에 백성 앞에서 자신을 철저하게 내렸습니다. 새로운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tm도인이 된 아름다운 모습은 나를 드러내는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드러내는 것에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겸손할 때 진정한 드러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도 하나님이 드러내실 때까지 주의 복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는 방법을 보면 똑같습니다. 세상적인 방법.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들어서 쓰지 않죠. 그러니 다 걷어 가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인내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든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이율배반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조금 손해 보지만 동네 경제를 살리는 일을 해보자. 자발적 불편을 이야기하지만 스스로 내가 불편하게 사는 것에 대해서 힘들어 합니다. 자발적 불편은 상대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불편하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말고, 조금 손해 보자. 손해 보지 않을려고 발버둥 치는데 거기에 무슨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겸손하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합니다. 내 지혜와 경홈과 생각과 계획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여 일하신다고 합리화합니다. 틀린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분명히 그렇게 일하십니다. 그런데 정직하게 내면을 살펴보면 그런가? 하나님께서 나의 죄와 지식을 사용하여 일하시는가? 아니면 내 경험과 지식이 앞서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이용하지는 않는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는 우리에게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다릅니다. 때때로 우리의 지식과 경험도 내려놓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모든 상황을 내가 할 수 있을 때 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나오미의 모습은 강한 도전을 줍니다. 나를 나오미라고 칭하지 마십시오. 나는 마라일 뿐입니다. 사람들 앞에 겸손해 내려놓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나를 맡기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나를 즐거운 자로 만들어 주실지 쓴 자로 남겨주실 지 하나님 앞에 맡기겠습니다. 그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 자신을 맡기고 나가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자세를 가질 때 하나님께서 일하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룻 1: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룻 1:1)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흉년이 들어서 나갔습니다. 모압에서 잘 살 줄 알았는데 돌아왔습니다. 돌아올 때는 보리 추수할 때라.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었을 때 하나님의 일하십니다. 보리 추수할 때를 통하여 룻이 보아스를 만나고 그리스도의 자손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보리 추수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하시는 상징입니다. 보리 추수의 놀라운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가지려고 하면 하나님이 내려놓게 합니다. 이 비밀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손해 보면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다 가질려고 하면 다 놓게 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를 낳은 즉 사망을 낳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욕심이 가득차서 다른 사람에 대해 욕심을 지적을 많이 하는 데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지요. 스스로 비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빈 손으로 왔더니 채워졌습니다. 하나님께 비는 훈련을 잘 하십시오.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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