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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24) - 룻기[8] 박석화 2014-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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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룻기3:1-6)

룻기 3장(1)

룻기 3장에 들어섰습니다. 2장까지에서 나타난 장면을 보면 나오미와 룻이 애굽을 떠나서 이방인 땅인 모압으로 갔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룻은 시모와 함께 어렵고 힘든 삶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되는 보아스라는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 장면만 보아도 인생에서 누구를 만나는 가를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에 따라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만남을 갖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만남은 부모입니다. 내가 원해서 만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보니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선택권도 없는 만난 부모와의 만남은 중요합니다. 어떤 부모를 만냐나는 것은 인생을 시작한 시점에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만남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친구를 잘 만나야 한다는 것과 선생을 잘 만나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에게 좋은 친구가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좋은 친구를 만났기에 곁길로 갈 수 있는 상황에서 곁길로 가지 않았고, 좋은 선생을 만났기에 꿈을 가지고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함께 살 배우자를 만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인생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삶이 많이 바뀌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인생의 만남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만남이 좋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잘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다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는 얼마나 불행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교회 표어를 보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행복의 시작입니다.’이었습니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를 만나면 해결되고, 신앙의 방황은 건강한 교회를 만나면 해결된다. 이러한 표어도 있습니다. 다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떤 교회를 만나느냐, 어떤 목사를 만나느냐는 중요합니다. 어떤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아니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모두는 이러한 보배를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복되고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 더 바꿀 수 없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에 참과 거짓을 알게 되고, 사랑과 미움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에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이 세상의 노예로 살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보다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문에 나온 것도 그러한 만남을 가진 것입니다.

오늘 룻이 만난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룻이 그의 인생 여정 가운데 시모를 만난 것은 복된 것입니다. 시모를 통하여 하나님을 안 것, 정말 복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중요한 한 사람 보아스를 만나는 것입니다. 장차 기업무를 보아스를 만나는 것은 룻과 나오미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입니다. 이런 놀라움 나오미와 룻은 결정을 합니다.

(룻 3:1)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나오미가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나오미가 지난 온 삶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의 삶에는 안식이 없었습니다. 안식이 없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주안에서 안식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평안을 누리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일이 안식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정신이 주일 가운데 있으니까 주일에 주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은 복 있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는 복이 있도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그치고 주 안에서 참된 평안얻기 때문입니다. 안식을 누리는 것은 그의 삶이 불안함에 연속인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안식할 곳과 복된 삶을 살자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룻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볼 것은 안식할 곳과 복된 삶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는 룻과 나오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는 참된 안식과 복은 깨어 있는 자가 누린다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을 잘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1장부터 보면 룻의 고백가운데 보면 나오미가 어떤 믿음의 결정을 했는지를 반증을 하여 줍니다. 시모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고백은 불안한 삶을 살게 하였지만 돌아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룻은 시어머니의 고백에 따라서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고 어머니가 간 곳에 내가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나오미와 룻이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신앙 고백을 가지고 깨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룻 3:1)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이 말씀을 잘 보면 참된 안식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보게 됩니다. 나오미는 참된 안식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참된 안식과 복을 줄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룻이 끊임없이 보아스의 집에서 보리를 가져오고 일하는 것을 최선을 다하여 준비케 하였고 흠 없이 살기를 주문하였습니다. 룻은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서 최선을 다해 흠 없이 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참된 안식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참된 안식이 어디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사는 지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식이 어디있는지 알면 그 곳으로 가면 되는데 인생의 방황은 참된 안식이 어디있는지 모를 때 생깁니다. 사람들은 안식이 물질, 권력, 노력, 사람과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신의 안식을 찾고자 하나 거기에는 참된 안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식인 줄 알고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것이 안식이 아니라 그것을 준비한 자 보아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아스라고 하는 기업 무를 자 중에 하나였습니다. 기업 무를 자가 먼저 있었는데 나오미의 눈에는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고 정직하게 하라고 룻에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참된 안식이 어디있는지 아는 자가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안식과 복된 삶이 어떻게 주어지는 알아야 합니다. 나오미는 알고 있었습니다. 룻 역시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이 안식과 복을 얻는 길이 기업 무를 자에게 기업을 무르게 되면 얻게 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이라는 것이 허공을 치며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은 푯대를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푯대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고백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지 않고서는 안식을 누리를 수 없습니다. 룻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안식은 결혼을 통하여 가정을 꾸리는 것입니다. 룻은 타향에서 안식과 복을 누리를 수 있는 길은 보아스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룻이 결혼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힘도 없습니다. 그는 결혼할 주도권이 없습니다. 그러나 길은 아는 것입니다. 보아스와 결혼하는 길 외에는 참된 복과 안식을 누릴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그 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길을 향하여 깨어있는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모습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우리도 영적인 안식을 위하여 달려고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안식은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이고 주어지고, 살 때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으면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사는 것이 참된 안식이요 영원한 안식이라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육신을 입은 우리는 보이는 것에 쉽게 넘어갑니다. 보이는 유혹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보이지 않는 유언비어도 쉽게 넘어가는데 보이는 유언비어에 얼마나 쉽게 넘어가는지 모릅니다. 그런 것이 안식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의 안식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고 사는 것에 있습니다. 참된 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본문을 통항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영적인 축복은 구하는 자가 얻습니다.


(룻 3:2) 네가 함께 하던 시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나오미는 이 일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보리타작하는 시기를 나오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축하하고 파티하는 자리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룻 3:3)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룻 3:4)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나오미는 룻에게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가서 타작마당에 가라고 합니다. 룻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옷을 입고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가서 보아스의 발치 이불에 누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룻에 대한 일을 보아스에게 이야기하고 이런 모략을 나오미가 짠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본문에 기록되지 않으니 그렇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게 볼 수 있는 정황은 본문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나오미와 룻의 중심이 정직하였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를 맞을 준비를 다하였습니다.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의 부름을 받고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잘 준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축복을 누리가 원한다면 축복에 대한 선망이나 부러움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축복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게 되면 천국에 대한 가르침을 주면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세례 요한때부터 지금까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침노를 당한다는 것은 천국이 힘차게 전진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자에게 천국의 선물이 주어진 다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구할 때 영접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천국은 친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그냥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은 최선을 다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감 떨어질 때까지 입 벌리고 있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감을 먹기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구하여야 합니다. 감울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구하라, 두드리라,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복을 소망하는 자라면 찾고 두드리고 구하는 자입니다.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우리는 이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찾고 구하고 두드린다는 것은 준비하는 자입니다. 오늘 룻이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비고 들어가서 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기다린다면 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못 누립니다. 그 자리에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이 주신 복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믿음은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기다리는 것임을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나오미의 모습에서 믿으므이 한 모습 성도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믿음의 삶입니다. 나오미의 제안에 룻이 순종합니다. 그 계획을 보게 되면 낯 뜨겁고 파렴치하다고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며 발치에 이불을 들고 눕는 것이니 우리가 생각할 때 이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문화와 풍습을 생각하면 이 말씀은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당시 결혼을 위한 프로포즈였습니다.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프로포즈를 상대방이 받아주면 결혼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끝이 나는 것입니다.


(신 25:7)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취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내게 행치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신 25: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이를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 취하기를 즐겨 아니하노라 하거든

(신 25:9)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


이스라엘 중에서는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어서 새롭게 형제에게 의문을 감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업 무를 자를 감당하지 않으며 신 벗기운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룻이 할 수 있는 일은 프로포즈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기업 무를 자이니 이 율법을 당신이 해주셨으면 합니다. 룻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결정은 보아스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적인 묘사가 아닙니다. 나오미와 룻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업 무를 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룻과 나오미가 할 것은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열심히 살았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속한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복은 17장에서 무익한 종의 비유를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7: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눅 17: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눅 17: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는 우리가 할 바를 다 한 것입니다. 종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은 무익할 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을 한 것뿐입니다. 이 말은 이제 주인의 처벌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상을 주겠다. 주인은 쉬는 데 종은 정말 열심히 일하며 수종을 듭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우리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일은 다하고 결과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룻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기업 무를 자가 누군지 알았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발치에 누워 이불을 덮는 것 뿐 입니다. 보아스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보아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깨어있엇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어떤 결과에도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고 믿음의 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을 이 모습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 있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을 압니다. 믿음은 말씀을 확신하고 순종하는 것임을 압니다. 우리는 정말로 우리 주님 앞에 있는 그대로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 일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으며 생각하여 봅시다. 나오미와 룻은 처절하게 살아야 하는 과부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이렇게만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나오미와 룻의 모습은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단순한 두 과부의 처절한 사투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그리스도만이 참된 안식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고 사투를 벌여야 합니다. 정확하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참된 안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간구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으니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고 하는 몸부림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속의 말씀을 보면 선하고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인도하여 주시고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사투에 알맞은 응답이 없다고 해도 선하시고 자비하시고 온유한 아버지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충만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앞의 현실 앞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삶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삶이라는 끊임없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자세로 있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아름다운 모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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