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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35) - 사무엘상[8] 박석화 201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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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사무엘상2:8-10)

 

 

사무엘상 2장(5)

 

우리는 계속해서 한나의 기도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2장 1절부터 8절 전반부까지를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고, 오늘은 8절 하반절에서 10절까지 이르는 분문을 통해서 한나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나의 기도를 볼 때마다 멋지고 아름답다. 존귀한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하나님 기뻐하시는 기도의 모습을 유감없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기도가 이러한 것이로구나 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정확하게 고백하고 있는 모습은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것을 함께 나눌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지만, 한나의 기도에는 하나님에 대한 풍부한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고가는 모두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구속사적인 고백을 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가다. 그래서 단순히 한 여인의 기도로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오실 메시야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은 전해준 말씀이 생각납니다. 베드로후서 1장 4-9절을 보게 되면,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아주 귀한 말씀을 전해줍니다. 4절 하반부에 보면,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렇게 말씀하신 후,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벧후 1: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신의 성품을 참여하는 자의모습이 잘 드러나는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는 어떤 자인가?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부지런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참여하는 자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한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열심인 것입니다. 저는 베드로전후서를 읽을 때마다 그러한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베드로전후서를 받는 사람의 상황이 녹녹치 못하거든요. 어렵고 힘든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 아닙니까? 흩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향을 떠나 있는 자의 삶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위로의 말이 많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따뜻한 말 한마디가 힘을 주는 사람입니다. 고향을 터나 타지에서 다른 사람들과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거기에도 종교도 다른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전해주는 것이 좋을까? 우리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위로와 권면, 따스한 말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베드로전서나 후서를 보게 되면 그런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베드로전서나 후서를 보면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키라는 것이 베드로 전후서에 나탸난 일반적 모습입니다. 너희가 누구인지 아느냐? 거듭난 사람들이다. 오히려 소망에 관하여 묻는 자들에게 준비할 것을 예비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베드로후서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한 이후에 베드로후서 3장 18절,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이야기합니다. 베드로전후서는 전체적으로 고난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풍성하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풍성한 사람이 진실로 고난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로와 권면도 필요하지만, 위로와 권면이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이기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충만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은 세상의 고난과 어려움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다. 이것이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들을 향하여 이야기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게으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고난을 이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갑자기 한나의 이야기를 하다고 베드로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면 베드로는 신약의 백성들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구약에서 베드로와 같이 동일한 선상에서 이 말씀을 전한 사람이 누굴까? 물론 많이 볼 수 있겠지만 한나의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나는 자신이 얼마나 힘든 삶에서 벗어난 충분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고난 가운데 성도의 삶이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는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한나의 기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고백,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고백이 자신이 처하여 있는 상황을 이기게 한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보여준 사람입니다. 한나의 기도를 보면 우리는 그러한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2장 1절부터 8절 전반부까지 고백한 하나님.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충만하게 드러났습니다. 2절 말씀처럼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어디에 있느냐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한나의 분명 고백, 변함이 없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 반석이신 하나님, 변함 없으신 하나님. 그리고 또 어떠한 하나님이냐면,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안고 서는 것을 아는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내 외면과 내면을 아시는 분입니다. 나의 기쁨과 슬픔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나 된 것을 누구보다 아는 자입니다. 이것이 한나의 기도입니다. 내가 고통 받고 있을 때 나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지식의 하나님이시거든요.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라는 고백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나가 어떤 고백을 합니까? 여호와는 역전의 하나님이시다.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유족한 자는 양식의 품을 팔지만 주리던 자는 다시 주리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은 가난하다고 해서 영원히 가난한 것이 아니고 부하고 해서 영원히 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을 떠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지만 가난하고 힘들다고 해도 정직한 자들을 하나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릴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것이고 죽은 것이나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역전 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한나가 고백하는 멋진 모습이 무엇입니까? 잉태는 못했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누구보다 더 자신의 삶을 통하여 증거 하지 않습니까? 그런 모습입니다. 역전의 하나님에 대한 한나의 고백은 얼마나 위대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을 때 삶의 고난과 환경 가운데 넘어지지 않고 이길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나의 고백은 단순히 감동적인 고백이 아닙니다. 신비주의적 고백도 아닙니다. 한나의 고백은 하나님의 지식 가운데 참된 믿음에 기반을 둔 고백입니다. 믿음은 내용과 신뢰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내용을 가질 때, 그 내용에 대한 신뢰를 가진 자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이 온전한 믿음 아니겠습니까? 한나의 기도는 이러한 믿음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한나의 신앙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나는 자신에게 닥친 어려운 환경에 넘어지지 않고 환경을 넘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 가운데 우리가 이길 수 있는 힘의 근원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이 약간의 유익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이 세상 가운데 영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고난과 고통을 이기게 하는 것은 부족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이길 수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없으면 환경 속에서 무너집니다. 하나님 왜 이런 상황을 주신 것입니까? 이러한 모습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자학하게 되죠. 아니면 남과 비교하게 됩니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것이 예수 믿는 자들에게도 나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풍성한 자는 그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을 묵상하게 되고 하나님이 떠오르게 되고 하나님과 함께 그 상황과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나가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단순한 개인적 측면이 머무르고 있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2절로부터 8절은 개인에게 한정된 기도의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주로 내용을 보면 그러한 모습이 나타나죠. 그런데 8절 하반절부터 10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한나의 기도가 폭 넓게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한나가 얼마나 깊이 알고 고백하고 있는 지를 보여줍니다. 본문은 크게 세 가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되는 대로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창조와 주권에 대한 고백입니다. 8절 하반절은 이러한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잘 보십시오. 본문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피조세계에 대한 분명한 고백입니다. 땅의 기둥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창조 세계의 기틀을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께서 땅의 기초를 세우고 그 위에 만물을 지으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고백, 이 땅의 기초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붙잡고 계시다는 고백이지요. 바울도 이러한 고백을 가진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한결 같이 이러한 고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도 로마서 11장 36절에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 마무리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6-17절 말씀입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한 목적이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시기 위하여 창조하였습니다. 만물의 주인에 대한 분명한 고백입니다. 만물이 삼위 하나님이 창조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삶을 받쳐주는 기반이기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 창조의 고백 위에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을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과학은 우주에 대하여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 가치가 우연이라는 기반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만들어진 것입니다. 긴 시간 가운데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들을 때 별 문제없게 들려지지만, 이 세상을 살아갈 때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연히 존재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창조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삶의 과정이 같을 수 없습니다. 왜 믿음의 선배들과 성경은 만물이 주께로부터 나왔다고 하는가?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서이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처럼 우연히 존재하였다고 한다면 삶의 목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 만을 위한 것 외에는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잘 먹고 살라고 합니다. 왜 잘 먹고 잘 살라고 합니까? 하난미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시기 위해서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창조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이러한 모습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우연에 따라 살지 않으니 통계에 따라 살아갑니다. 수학적으로 이야기하면 통계이지만 점보는 것이 통계입니다. 서양은 점성술, 동양은 토정비결 다 통계입니다. 요즘도 젊은 사람도 점보고 있습니다.

오전에 선교사님과 함께 지나가는데 젊은 두 사람이 타로점을 보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이 말하기를 ‘저들은 심심해서 들어갔겠죠?’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짜 믿으니까 들어갔다’고 봅니다. 기반에 우연의 기반에 산다고 한다면 두려워서 살겠어요? 무엇인가를 부여잡아야 합니다. 창조를 기반에 두지 않으니까 우연에 기반하여 사는 것입니다. 점보는 사는 것입니다. 점보는 것은 우연의 연속이 통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기반하여서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함과 미래에 기대감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나의 고백이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다. 여호와께서 세계를 놓았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받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만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요.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완벽하게 알 수 없지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삶에 우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우리는 오늘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때 교만에 선다든지 절망에 선다든지 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삶이기에 전혀 다른 인생의 모습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현실 우선적으로 살아갑니다. 창조의 목적을 아는 사람은 결코 의미 없이 살지 않습니다. 우연으로 사는 것은 의미 없이 사는 것입니다. 죽으면 끝이지 그러자나요. 그러니 우연히 살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는 것도 우연히 온 것이 아니기에 죽음도 우연히 오지 않았습니다. 삶의 시작과 끝과 과정이 전혀 다릅니다. 전혀 다른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뿐만 아니라 신학적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땅의 기둥들이 자연적인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간의 삶, 우리의 본질적인 삶의 모습까지 나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세상에 만들어 놓은 법칙과 정치, 정치 모든 문화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기초 위에 세워질 때 온전히 이해 될 수 있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을 향한 하나님의의 주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세우셨다고 하는 것은 인간 세계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고백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 문화 모든 것에 이르기 까지 모든 인간이 감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는 것을 말하는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전개될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스라엘 왕 사울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지만 얼마되지 않아서 퇴위를 당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왕인 다윗이 왕이 되고 그 다음에 솔로몬이 이어받습니다. 영원할 것 같은 다윗 왕가가 두 나라로 쪼개집니다. 왜 쪼개집니까? 쪼개진 나라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방 나라의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모습을 보는 것이죠. 하나님의 주권 안에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시행되고 성취되어졌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이었을 끊임없이 알려줍니다. 이 고백이 한나의 기도에서도 충만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땅의 기둥들이 여호와의 것이고 세계가 그 위에 세워졌도다라는 고백에서 그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기반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를 얼마나 건강하게 만드는지를 모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동일하게 힘들도 어렵고 지친 인생을 살아갑니다. 다 고난 속에 있습니다. 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가집니다. 오히려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지 않고 있으면 고난만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생각하여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는 고난 받을 것이다. 그런데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는 말씀을 생각한다면 고난과 이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계시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누리고 있지 못하면, 우리의 눈에는 현상만 보입니다. 고난만 보이든지 즐거움만 보입니다. 그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까? 잠언 말씀에 무엇이라고 합니까? 너희가 부자 되기를 기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 앞에서 부자인 사람은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어제 손봉호 장로님은 모든 재산을 사회로 환원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집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제자 목사님이 살고 있습니다. 부모님에게 받은 재산인데, 자신이 쓰지 않고 제자 목사에게 주고 그 집을 주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은 재산도 다 기부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하냐면, 잠언 말씀 앞에 부자가 서면, 그 고백을 해야하잖아요. 왜 부자 되기를 기뻐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부자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로 끝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있느냐?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느냐? 이러한 고백이 삶의 모습을 완전히 다르게 만듭니다. 중요한 고백입니다.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두 번째는 보호자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보디가드 하나님. 창조와 주권에 대한 고백을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고백으로 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나는 우리의 보호자라고 고백합니다. 당연한 고백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정말 중요한 고백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보디가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의 보디가드가 되어주십니다. 보디가드는 임무는 무엇이죠? 끝까지 지켜주는 것입니다. 어떠한 곤경에도 능히 제약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디가드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9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삼상 2:9) 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힘으로는 하나님을 이길 사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면 얼마나 편안하겠습니까?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 이 고백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합니다. 이 믿음이 있으니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환경이 엄청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밀려오는 것 같더라도 우리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결코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완벽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냐면 두 가지를 말합니다. 거룩한 자를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악인을 잠잠케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자들을 구별된 자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죄악의 자리에서 떠난 자들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며 지키시며 그가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킬 것이라고 하는 것이죠. 거룩은 하나님은 영화롭게 하고 그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시편기자는 121편 3-4절에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시 121:3)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이 말씀 앞에 아멘이 안 나오십니까?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실족지 않게 하십니다. 나는 실족했는데요? 하나님은 거짓말 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내가 실족해놓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실족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자는 졸지 않으십니다. 주무시지 않고 우리를 불꽃같은 눈으로 지키십니다. 거룩한 자의 발을 지키신다고 하였습니다. 발을 지켜주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삶이 방황하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자를 끝까지 사랑하여 주십니다. 이러한 사랑을 충만하게 받았던 다윗이 그가 멋있는 고백 가운데 하나가 시편 23편 아니겠습니까!

 

(시 23: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러분 생각하여 보세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믿음의 선배들의 고백입니다. 한나의 기도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의 발을 지켜주신다.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나의 겪었던 상황이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고난과 모역을 견뎠습니다. 다윗은 안 그랬습니까? 미친 짓까지 하면서 살지 않았습니까? 궁궐에서 쫓겨나는 삶이었고, 장인에게 죽임을 당할려고 했고, 광야를 떠돌아 다녔던 사람, 아둘람 굴에서 살았던 삶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상황 가운데 절망하지 않고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시는 하나님. 이 고백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 가운데서 절망이나 낙망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자들의 발.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나의 고백이 여기에 머물지 않고 악인을 잠잠케 하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나아갑니다. 악의 활동은 흑암입니다. 거룩이 사라지고 권모와 술수 그리고 지독한 인간 중심이 있는 삶이 활동하는 영역입니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 악인들을 잠잠케 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생각하여 보십시오. 거룩한 자의 발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악인들을 잠잠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악인들이 활동하는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악인이 득을 거리는 세상에서 거룩한 자로 살아갑니다. 악한 세력이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온갖 짓을 합니다. 정직한 자가 대접받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랑받지 못하고 오직 있는 자들의 횡포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세상 아닙니까? 얼마나 돈 있는 사람이 잔인하냐면, 땅콩하나 잘못 했다고 부사장인 여자가 사무장을 비행기 가는 도중에 내리라고 하는 경우도 있자나요?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이런 모습이 득실거리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을 무시하는 세상 아닙니까? 배운 자들이 못 배운 자들을 무시하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어렵고 힘들수록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자발적으로 섬겨주는 모습이 아니잖아요? 정말 악한 모습이 가득 차 있습니다. 부패된 인간의 본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만이 주인 노릇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사라지고 종교인들의 안식처가 되어버린 현실이 흑암이 아니고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런 세상 가운데 거룩한 자들이 사는 것은 만만치 않습니다. 악한 자들이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지 않습니까? 소망이 없지요. 그 놈이 그 놈이라고 자주 섞이 농담이 있는 세상 아닙니까? 변한 것도 없는데 라고 말하는 세상 아닙니까? 한나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다고 해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이니까요? 한나니까요? 이렇게 말하고 말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한나와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고백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악한 자를 잠잠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다면 누구도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9절 하반절에 힘으로 이길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이 강력하도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신다고 하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합니까! 바울의 고백이 딱 맞습니다.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 누구도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 어떤 흑암의 세력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없습니다. 왜요? 우리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보디가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믿음이 이 땅 가운데서 정말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하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고백이 우리에게 충만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충만한 고백을 가지고 사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고백을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대로 믿고 고백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마침내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은혜를 반드시 누리기를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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