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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 연구(245) - 사무엘상[18] 정대원 2015-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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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연구 (사무엘상 6장 19 ~ 7장 2절)

 

 

사무엘상 6장 [2]

 

 

 

 

오늘 이 내용은 블레셋으로부터 넘어 온 궤가 벳세메스 지역에서 일어난 실수와 동시에 기럇여야림에서 일어난 두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두고, 사람들이 어떠한 반응과 결과를 내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블레셋으로부터 넘어온 언약궤에서 기뻐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지 말아야할 행동을 하게 되었고, 결국 심판을 받게 됩니다.

결국 이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이라고 하는 지역으로 옮겨지고, 그 지역에서는 20년동안 머물게 됩니다. 후에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안정되고나서, 언약궤를 다시금 들여오기 까지 이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우선, 벧세메스 지역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크게 진노하십니다. 진노의 결과가 19절에 나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본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

여기 가로가 처져있는 것은 어떤 사본에는 기록되어있고, 기록되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벧세메스 지역에 진노가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비참하였을까요.

자신의 친척들과 가족들이 죽음으로 통곡의 땅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의 가장 큰 실수는 무엇인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동시에 기럇여아림에 나타난 모습을 봅시다.

 

첫 번째로,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언약궤는 벧세메스 사람들에게는 축복이었습니다. 임재의 상징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모시고 언약궤를 가지고 있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를 가져올 때, 싸워서 가져온 것이 아니고, 거저왔습니다. 그것도 놀라운 것은 올 때, 번제를 드릴 수 있는 소가 왔습니다. 제물도 왔습니다. 그들은 그냥 앉아서 누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한 어떠한 행위도 없었습니다. 그저 넘어오는 언약궤를 맞이했던 것 뿐입니다. 거저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복이 한 순간에 슬픔으로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슬픔이 되었습니다. 그 복이 벧세메스 지역에 오히려 진노의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들이 언약궤를 열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를 열어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에 들떠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던 것입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언약궤 이동을 보는데, 이 때 덮개를 계속 덮어서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아주 완벽하게 덮습니다.

 

언약궤를 옮기다가 성물에 손이 다으면 죽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가르쳐주신 율법이었습니다. 함부로 해서는 안되고, 제사장만 열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러한 율법을 망각하였습니다. 언약궤는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임재를 상징하죠. 하나님의 거룩함이 거기에 있는 것이죠.

사사기 6장에 보면, 기드온이 나오는데,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나서 이제 내가 죽게되었다 고백합니다. 그 거룩함 앞에 설 자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말씀해주신 것이죠.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 잊었고, 불경을 행한 것이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빼앗기게 된 원인은 홉니와 비느하스의 타락이었죠. 이스라엘 전체에 온갖 추악함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도구로 사용한 것이죠. 이 모습들이 이스라엘의 패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경을 동일하게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면 안됩니다. 가볍게 여기는 순간, 축복의 자리가 슬픔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지만, 나를 경멸히 여기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말씀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의 행위는 경멸히 여기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진노를 피할수 없습니다. 이것이 다스림의 변함없는 원칙입니다. 결코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복의 통로는 말씀입니다. 기록된 말씀과 선포된 말씀입니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말씀이 증거되는 곳에 교회가 세워졌고, 듣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었습니다. 교회사 가운데 말씀 선포자 없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다음 세대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한 것에 대한 진노는 레위기 101-3절 봅시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드리는 불이 있었는데, 그들은 임의로 불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이 있는 자리에서 죽이십니다. 그런데 이게 하나님의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전체가 거룩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이 거룩함을 훼손하는 것은 하나님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의롭게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율법으로 보내어 거룩하게 한다. 청교도들의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죄를 사함받는 길을 그리스도 앞에서 찾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시는 것입니다. 의롭게 된 우리는 다시금 율법으로 보냅니다. 그 율법이 거룩하게 살게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레위기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거룩함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사야 524-25

이로 인하여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자는 심판하십니다. 거룩함이 훼손되면, 기쁨이 변하여 슬픔이 되고, 복이 아픔이 됩니다.

 

세 번째, 회개의 자리가 아닌 회피의 자리에 선 것입니다. 우리는 실수합니다. 죄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소망하는거죠. 죄가 없는 상태, 상상이 되십니까. 상상할 수 없죠. 생각만해도 대단합니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은 19절 봅시다.

하나님이 죽이셨고 애곡합니다.

20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징계받았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일은,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우리의 죄를 용서함받고 언약궤를 잘 모시겠습니다 라고 해야되는거죠. 그런데 이들이 이 궤를 누구에게 가게할꼬 합니다.

21절 봅시다.

사자들을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내어 가로되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가라

 

하나님의 복을 다른이에게 주는거죠. 이게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조건없이 선물을 주셨는데, 이들은 그 은혜를 던져버립니다. 회개의 자리에 서야죠. 하나님 저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고, 기회를 주소서,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두려움 앞에 떨 뿐, 어떻게하면 이 징계를 피할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자마자, 떠나게 됩니다. 이것이 벧세메스 사람들의 실수였습니다.

이 언약궤는 기럇여아림 지역으로 옮겨갑니다.

이 사람들은 벧세메스 사람들이 범한 실수를 반복치 않습니다. 왜 진노를 받았는지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누린 것입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도 가만히 있었는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올라와서 가져가라 합니다. 이들 역시 아무 공로 없이 언약궤를 받습니다.

복이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복을 충만하게 누립니다.

 

71절 봅시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첫 번째, 축복의 기회를 거룩히 구별하여 섬깁니다.

이들이 처음부터 궤를 옮기고, 아비나답 집에 놓고, 거룩하게 구별합니다. 따로 모신 것입니다. 이게 모리아산입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놓고, 그 후에 엘리아살을 구별하여 섬기게 합니다.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궤를 지키는데 헌신합니다.

2절입니다.

궤가 가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20년동안 이 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20년동안 헌신하고 봉사한 것이죠. 20년동안은 기럇여아림 지역에 하나님의 복이 충만한 것입니다. 최선을 다한거죠. 이게 아름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자는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잘했다 충성된 종, 끝까지 헌신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찌어다

 

2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셨고, 은혜를 누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2절 봅시다.

궤가 가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벧세메스에 있을 때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죠. 20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사모하였다는 것입니다. 거룩히 구별된 일로 섬길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게 기럇여아림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축복에 대한 자세를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예수님 믿은 것이 나의 열심과 투쟁을 통해 얻었습니까. 아니죠. 돈으로 된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축복이 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공짜로 얻으면 아무렇게나 행동합니다. 비싸게 산 물건은 소중히 여기지만, 공짜로 선물 받으면 아무렇게나 사용하죠. 우리가 받은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엄청난 금액입니다. 그런데 거저 받았습니다.

 

히브리서 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이죠. 함부로 살면 징계하십니다. 평강의 열매를 맺게하시기위함이죠. 하나님은 자녀가 자녀답게 살지 않으면 징계하십니다. 근데 바울은 고전 11장에서,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모두 성찬에 참여하는 특권을 갖습니다. 그렇다할지라도 다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말합니다. 자신을 거룩하게 하지 않고, 죄를 회개하지 않는자는 죄를 먹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성찬이 기쁨의 자리이지만, 슬픔의 자리가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기럇여아림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즉 너희가 은혜를 받았으면, 구원 받은자답게 구원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자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퍼져나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여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향기라 이야기합니다.

고후 214-16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이게 우리의 존재입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쓰여지라고 은혜를 거저 주신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내 가까이에 있는 가족, 친구, 친척, 동료, 온 식구들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는 일에 쓰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구원하신 이유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냄새가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구원받은 자로서 구별되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언제까지일까요?

주님께서 그만 됐다 할 때까지입니다. 이게 우리의 일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제 제가 할 일을 마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날까지 헌신함으로, 예수 믿는 자는 다르구나, 구원받은 백성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되돌아보고 결단하고 고백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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