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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 연구(244) - 사무엘상[17] 정대원 2015-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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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사무엘상 6장 1절 ~ 18절)

 

 

사무엘상 6장 [1]

 

 

 

 

우리는 5장에서 블레셋이 전쟁의 전리품으로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궤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잖아요. 그러나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을 무너뜨리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다곤 신전이 무너지고, 그 지역에 엄청난 징계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은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살 수 없었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쳤습니다. 이리저리 옮겨다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의를 합니다. 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달라. 무려 7개월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궤를 다시금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 내용이 오늘 사무엘상 6장의 내용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과정을 담고있는 것입니다. 빼앗겼던 여호와의 궤가 다시금 자발적으로 돌아오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1절과 2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있은지 일곱 달이라

블레셋 사람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그것을 어떻게 본처로 보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블레셋의 지도자들과 복술자들이 이 일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이 제안을 합니다. 복술자들과 지도자들이 3-5절까지 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찐리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여호와의 궤를 빼앗고 전쟁에 승리했는데, 거꾸로 패배한 사람들, 패배한 이스라엘의 신에게 영광을 돌리자 라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전쟁에 승리한 7개월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였던 당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온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였던 이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깨닫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였던 역사적 사건이 사실이었음을 블레셋 민족이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6절입니다.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출애굽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반추하게 됩니다. 여호와를 모독하였던 결과를 살펴보면서 자신들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블레셋의 지도자들과 복술자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언약궤를 돌려보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최대한 예우를 다해야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게 전쟁이 승리한 나라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블레셋은 외형적인 승리가 모든 승리라고 본 자만을 가졌던 것입니다. 전쟁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신데, 마치 내가 외적으로 이루었다는 자만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하고 무시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외적인 성공을 거두면 마치 내가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이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 왜 오시나요? 예배 왜 드리시나요?

우리가 어떻게 교회 오고, 예배 올 수 있죠? 어떻게 우리가 예배할 수 있죠?

이것을 잘 모르면 율법적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무엇을 얻기위해, 주기위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셨고, 은혜를 주셨잖아요. 그 은혜가 감사해서 오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만으로 우리는 감사하고 예배해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필요한게 뭐가 있나요? 하나님이 필요한거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때, 나머지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심 때문입니다. 헌상은요? 헌상을 하는 이유가 뭔가요? 뭔가를 받고자 함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생각을 갖는순간 율법적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 은혜에 감사해서 하는 것입니다. 헌상에 따라 아무것도 안 주셔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허무는 여우는 다시금 율법적 신앙으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답게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에 감사함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하도록 부르신 것이죠. 그래서 늘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거예요. 살았더니 감사해요. 그리고 또 알려주는 거죠. 그래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주어지는거죠.

분석은 여러분들이 그 다음에 하는 것입니다. 일단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물어볼 때는 그것을 알려고 질문합니다. 베뢰아 교인들은 바르게 알고자 질문한 것입니다. 더 깊이 알고 싶어서 질문을 갖고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진리를 알고 싶은 거예요. 잘못을 지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죠. 은혜가 떨어지면 그렇게 됩니다. 마치 블레셋 사람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외형적인 것들이 사로잡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스스로 지혜있다 하는 순간 무너지게 됩니다. 결국은 마음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떠나게 되면, 오판을 하게 되고, 삶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진정한 성공과 승리는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때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때 승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셔야 되요.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지 않고, 내가 드러나면 반드시 탈진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죠. 늘 하나님이 하시게 해야 합니다. 나의 성공은 나의 전리품이 되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결정을 내린 후의 내용이 7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자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젖나는 소는 막 송아지를 뗀 어미소입니다. 예진이를 떼어놓고 엄마가 가는거예요. 그 엄마가 편안히 가겠어요?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의심이 있으니까 이렇게 하는거죠. 벧세메스로 가는 소는 인도자도 없이 홀로 가는거예요. 그런데 결과가 어떤가요?

10-13절에 보면, 암소들이 본능을 거부하고 일어난 일을 보게됩니다.

12절입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가니라

 

갈 때 한번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본능이 지배당한거죠. 이건 초자연적인 개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암소는 벧세메스로 그대로 갑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돌아갑니다.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암소를 가지고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승리한 자들이 보낸 제물과 함께 제단을 쌓는 것을 보게됩니다.

 

이 장면을 보고자 합니다.

역사에는 결코 우연이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정말 하나님이 하신 것인지, 의심하면서 보낸거잖아요. 이 역사는 우연히 일어난다. 역사는 자연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지 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죠. 내가 열심히 살아서 여기까지 온건가요? 열심히 하면 교회 성장시킬 수 있을 것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블레셋 사람들 같이 우연과 섭리를 저울질 하는 이 시대 가운데 우리가 살고있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이끌어가고, 그 손에서 운영되어집니다. 나의 개인의 삶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면, 인도해주시는 손길을 안다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이것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꾸 본능대로 살고싶은거예요. 직장 이후 쉬고싶죠.

 

많은 사람들이 서구에 경제체제를 부러워해요. 가정을 위한 기업이요. 그런데 부러워만 하는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런데 기도하지 않아요. 기도해서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체계이고 구조인지,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는 구조로 바꿔달라고 탄원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다는거죠. 기도할 수 있는데 말이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자는 체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움직이면 막을 수 없기 때문이죠.

 

두 번째로 본문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승리자가 나옵니다.

15절 봅시다.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를 드리니라

 

블레셋 사람들은 각 지역마다 가진 내용들을 가지고 번제를 드리는거죠. 전쟁은 블레셋이 이겼죠. 진정한 승리는 하나님이 하셨죠. 이방인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를 죽일 때, 사람들은 환호했죠. 그를 무덤에 가뒀죠. 잔치를 벌였겠죠. 그런데 진정한 승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진정한 승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역사의 진정한 승리자는 그리스도이고, 그에게 접붙여진 우리가 승리자입니다. 우리는 패배의식을 가지고 살면 안돼요. 승리자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승리자는 하나님이지, 외적인 조건이 아니예요. 이게 무너지면 끝나는거죠. 비교하고 체념하게 되요.

 

죽음을 이기신건 그리스도입니다. 죽인자는 다 죽었고, 그리스도가 살아나셨습니다. 이게 역설이예요. 역설의 신학을 붙잡아야 해요. 그래야 교회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피로 사신 자녀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실수를 범하였지만, 하나님은 버리지 않습니다. 고생은 시키지만,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소견에 따라 살면 채찍질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스스로 채찍질을 맞으십니다.

자녀를 사랑하셔서, 바르게 세우고자 자신이 아픔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보처럼 생각합니다. 마치 아무것도 모자란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이 있죠. 그게 사랑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니까 참고 인내하고 아파하는거예요. 자식들 대신 아파하는거예요.

부모는 자기가 아픈거 자식들한테 이야기하지 않아요. 암에 걸려도 이야기안해요.

그런데 그 부모는 자식을 끝까지 지키고 자신은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잖아요. 예수님이 잘못이 있었나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사랑하셨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때때로 아픈 자리에 떨어질 수 있어요. 히브리서는 말하죠. 너희가 사생자가 아니라 자녀라. 자녀이기 때문에 때때로 채찍질을 한다는거예요. 채찍질 어떻게 하죠?

 

자신에게 하셨고 자신이 죽으셨어요. 자녀를 위해 자신이 죽으셨습니다. 자녀를 위해 자신이 참고 인내한 것입니다. 그걸 몰라요. 그러니까 성령은 그리스도가 너희를 위해 한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는거예요. 그리스도가 널 위해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알려주십니다.

인내하고 참고 기다렸더니 그 아름다움을 기다리는게 신앙이예요.

 

정말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믿음의 길에서 흔들리거나 의심해서도 안됩니다.

이제 우리가 할 것은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라 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떠나면 영적인 침체에 빠지고 죄의 종이 됩니다. 말씀을 말씀대로 받지 아니하면 죄의 종이 되요. 교회 안에 와도 지옥문에서 만날 수 있어요.

 

데살로니가전서 313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제가 이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 말씀으로 전하고, 받는 자가 말씀으로 받을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이 전체가 아니라, 그 하나라도 전해지면 우리가 변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거나,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를 때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찾아가는거예요. 이거 모르면 절대로 역사하지 않아요. 사람의 말로 듣는데, 무슨 역사가 있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 말씀대로 아멘하면 역사가 일어나지만, 거듭나지 않으면 말씀을 받지 못합니다. 사단이 하는 일이죠.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면, 상고하고 물어봐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예배 드리고, 말씀 나눔해야 합니다. 말씀 분석하고 비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확인하고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역사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기준은 영적인 성숙과 침체의 기준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이게 사는 길입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모습을 통해서 자기 자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삽시다. 우리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은혜를 얻기위해 은혜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는 말씀을 듣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넘치면, 예배에 오고 싶어하게 됩니다. 그것이 죄의 자리에 떨어지지 않고, 은혜의 자리에 서게 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를 통하여서 본문을 볼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 그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고, 오늘 우리에게 주는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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