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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13) - 사사기[27] | 박석화 | 2014-03-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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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사사기18:1-31) 사사기 18장 오늘 사사기 18장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사사기 17장에 나타난 미가 집안에 나타난 레위 소년의 모습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라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약간의 음식과 재산을 주어서 개인의 제사장이 되었던 레위 사람이 하 사람의 제사장이 좋겠냐? 한 지파에 대한 제사장이 좋겠느냐? 라는 소리에 일순간에 변하여서 자기가 섬기던 미가 집안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이끌어 가는 것을 봅니다. 본문에서 중심은 레위 제사장의 행태입니다. 참 슬픈 장면입니다. 그리고 19장에 슬픈 이야기 지속됩니다. 그 때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것이 반복됩니다. 왕이 없다는 것은 자기 소견대로 살았다는 것이고, 힘센 자가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기준이 없이 자기 소견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중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을 때 사람을 왕으로 섬기려고 하는데, 사람의 왕이 없으니 엉망진창이며 무질서합니다. 무질서하다는 것은 독재보다 더 나쁩니다. 18장은 종교화된 신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 오는지를 여실이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사사기 18장은 종교화된 신앙의 불행이 무엇인지 종합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는 미가라고 하는 한 집안의 죄악을 넘어서 한 지파로 넘어갑니다. 17장에서는 미가가 자신의 제사장으로 삼으나 이제 18장에서는 단 지파가 자기 지파의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개인의 죄에서 지파의 죄로 넘어갑니다. 계속해서 추악하고 더러운 일들이 진행되는 것을 봅니다. 사사 시대의 부끄러운 일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불쌍한 성도와 제사장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늘은 18장을 통하여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는 배워야 합니다. 참된 교회에 참된 신앙을 가지고 참된 성도로 살아가야 할 신앙에 대해서 우리는 18장을 반면교사 삼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1-2절은 단 지파 사람들의 정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6절은 정탐꾼들과 레위 소년 제사장과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7-13절을 보게 되면 라이스를 정복할 준비하는 단 자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4-21절까지는 단 자손과 레위 소년의 찬탈을 위한 모의가 주어지게 됩니다. 21-26절은 단 자손을 좇아간 미가가 스스로 포기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24-26절을 싸우려고 하다가 위세에 눌려 집으로 돌아가는 미가의 못습을 보게 됩니다. 27-31절은 라이스를 정복한 단 자손과 라이스라는 지명을 단이라고 바꾸고 쌓게 됩니다. 여전히 단 지파는 단 성읍에서 이전에 미가가 행하였던 우상 숭배를 그대로 이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보는 것은 미가의 한 집에서 우상숭배가 단 지파로 확장된 것입니다. 죄가 확장된 것입니다. 죄가 확장되는 일에 주장하는 자는 제사장입니다. 죄가 관영되고 확장되는 것에 대해서 목숨 걸고 책망하며 막아야 할 제사장이 죄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을 봅니다. 다시 한 번 이 장면을 생각을 하면서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하고자합니다. 본문을 통하여 첫 번째로 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으면 계속적으로 일탈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본래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갈 때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살지 않으면 자신의 자리에서 일탈하여 죄의 자리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단지파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17장에서 미가 한 사람의 일탈을 보여주었다면, 18장은 한 지파의 일탈을 보여줍니다. (삿 18: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 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기업의 땅을 분배하지 못했다는 것은 단 지파가 정착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 지파에게도 다른 지파와 동일하게 땅이 분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분배된 땅을 정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수 19:40) 일곱째로 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수 19:41) 그 기업의 지경은 소라와 에스다올과 이르세메스와 (수 19:42) 사알랍빈과 아얄론과 이들라와 (수 19:43) 엘론과 딤나와 에그론과 (수 19:44) 엘드게와 깁브돈과 바알랏과 (수 19:45) 여훗과 브네브락과 가드 림몬과 (수 19:46) 메얄곤과 락곤과 욥바 맞은편 경계까지라 (수 19:47) 그런데 단 자손의 지경이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센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음이라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센을 단이라 하였더라 (수 19:48) 단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얻은 기업은 이 성읍들과 그 촌락이었더라 이 장면에서 여호수아가 명확하게 기업 분배에 대해서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사사기 1장을 보게 되면 전혀 다른 장면을 보게 됩니다. (삿 1:34)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분배 된 땅을 단 자손이 지키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감당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실 땅에 대해서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파별로 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파별로 주었고, 그 땅을 차지하여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모리 사람과 전쟁하는 것이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이니 어렵더라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내가 가는 길이 어렵더라도 도망가거나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단은 그 전쟁이 어려우니 어려운 길을 선택하지 않고 쉬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아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바로 미가의 살고 있는 지역을 침탈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에브라임 산지로 와서는 안 되는데 지금 단 지파는 블레셋과의 싸움이 너무 힘드니 가장 쉬운 곳을 찾아 왔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미가의 집안을 가보니 평안하고 싸움도 없고 너무 좋은 것입니다. 힘이 있는 자가 없으니 너무 쉬운 곳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단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결국 미가가 살고 있는 에브라임 산지에 와서 약탈하고 침략합니다. 거기에 단이라고 하는 이름을 세웁니다. 또 미가 집안이 섬기고 있었던 우상을 그대로 사용하여 자신의 지파의 우상으로 삼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지파에서 첫 번째 우상 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두 지파 가운데 본격적으로 단 지파가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가를 보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갈 때 한 집안이 얼마나 부끄럽고 종교화된 신앙으로 바꾸고 하나님을 얼마나 부끄럽게 하는지 보았다면, 18장에서는 그 죄악이 커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도 일탈하여 간다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신약적 표현이라고 하면 좁은 길입니다. 바울을 표현대로 한다면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것입니다. 단 지파가 지금 갈 길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주신 땅에 가서 정복하고 땅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좁은 길이 어려우니 고난 받는 길어 어려우니 쉬운 길로 가는 것입니다. 쉬운 길은 일탈의 길입니다. 신앙에서 쉬운 길을 반드시 일탈로 갑니다. 설교가 쉬워지면 일탈합니다. 교회의 교인되기 쉬우면 일탈됩니다. 교회가 바른 신앙 고백을 이야기 하지 않으면 일탈되어 집니다. 어제 하나의 글을 읽으며, 몰랐던 사실을 배웠습니다. 군대에서 진중 세례를 받습니다. 그 세례를 받을 때 세례를 받는 사람 가운데 분명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그렇게 받은 분들의 세례를 인정해야 할까요? 신앙 고백 없이 받은 세례가 합당한 걸까요? 다시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니더라고요. 종교 개혁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하였고, 바른 신앙 고백이 없는 세례는 세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분명한 신앙을 고백할 때 다시 세례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세례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세례는 분명한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신앙 고백이 없이 세례 받은 것은 세례 받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 고백 없이 세례를 받았음에도 후에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이 생겼다면, 세례를 다시 받을 수 있고,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신앙 고백을 분명히 한다면 그 세례는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를 든 것은 세례를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쉬운 길로 갈 때 일탈하게 됩니다. 이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쉬운 길로 가게 되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기 귀를 간지럽게 하는 설교를 듣기 시작하면 더 이상 복음과 같이 고난 받는 길에 서지 못합니다. 이는 교회가 무너지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알 때 온전히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단 지파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생각대로 했을 때 얼마나 큰 죄악이 일어나는지 보게 됩니다. 두 번째로 보는 것은 거짓 지도자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거짓 지도자를 분별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어렵습니다. 거짓 지도자를 분별하는 방법은 성경을 읽고, 교회사 가운데 남겨진 영적 유산을 찾아 읽어야 합니다. 거짓 지도자들이 가르친 것을 배웠는데 우리에게 책임이 있느냐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용납함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신앙 고백서와 교리를 남겨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도리가 무엇인지 남겨두었습니다. 말씀을 읽어야 하고, 교회사 가운데 남겨둔 신앙 고백서를 찾아야 하고, 믿음의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매우 어려운 신앙생활 하게 됩니다. 거짓 지도자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를 처음 믿는 사람도 가능합니까? 사실 어렵지요. 그래서 생각하기를 그 시점에 설 때 가장 힘들겠다는 생각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내가 먼저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사 가운데 기라성 같은 믿음의 선배들이 제시해준 참된 교회를 찾는 법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 일을 어떻게 압니까? 참된 교회가 끊임없이 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역사하여 참된 교회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책망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참된 교회라고 하는 것이 역사적 신앙 고백과 교회사 가운데 검증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거짓된 지도자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사사기 17장에서 레위 소년을 보면서 탈선된 지도자의 불행에 대해 보았습니다. 18장은 거짓 지도자를 더욱 실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8장에서 볼 수 있는 거짓 지도자의 모습은 첫 번째로 하나님의 진리보다 사람의 마음에 드는 것을 전하는 자입니다. (삿 18:5)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우리의 행하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삿 18:6)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소년은 영적인 능력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 지파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가 제사장으로 살았으니 하나님이 주시는 뜻을 깨달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자신의 배만 따뜻하게 하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가 분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단 지파 사람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합니다. 예를 들면, 레위 소년이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면, 단 지파의 사람들이 하는 일이 불의한 일인지 알았다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불의한 일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불의한 일을 막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이왕이면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 서로 좋은 것으로 해나가는 것이 좋잖아요. ‘목사님 꼭 이런 것을 해야 합니다.’ 하면 ‘알아서 하세요.’ 하고, ‘예배시간에 앉아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하면 ‘좋은 대로 하세요’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편한 대로 하세요.’ ‘좋은 대로 하세요.’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입니다. 개그맨같이 웃기는 것입니다. 처음은 좋은 것 같지만, 마지막은 멸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말세에는 거짓 선생이 나타나는 데 그들의 특징은 우리의 귀를 간지럽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간지럽게 하는 자를 찾습니다. 사람들의 간지럽게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간지럽게 해주는 데로 갈려고 합니다. 이는 멸망의 길입니다. 분명한 것은 말세가 이룰수록 분명해 집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바르게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가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생각에 맞지 않다면 그 길이 하나님께서 주신 길이라면 가는 것이 맞습니다. 설교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길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 설교자를 기대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가슴이 찢겨도 옳은 것을 전하는 설교자에 기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며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부와 명예 앞에 소명을 팔아먹는 것입니다. (삿 18:19)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낫겠느냐 (삿 18:20)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취하고 그 백성 중으로 들어가니라 제사장이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미가보다 더 큰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부귀와 명예를 구하는 지도자는 뛰어난 설교를 하고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삯꾼이고 거짓을 전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가 견제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목사의 삶이 온전해 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바른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목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동시에 목사는 자발적 불편을 살고자 몸부림쳐야 합니다. 이것이 같이 가야 합니다. 그런데 따로 가게 되면 삯꾼과 어긋난 성도들만 양성되는 것입니다. 거짓된 지도자의 모습은 분명합니다. 특별히 목사들이 체면에 따라 살면 삯꾼이 되는 지름길이 됩니다. 목사는 체면 문화에서 벗어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종보다 사람의 주인으로 사는 자입니다. (삿 18:27) 단 자손이 미가의 지은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고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평안한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불로 그 성읍을 사르되 (삿 18:28) 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그 성읍이 베드르흡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시돈과 상거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단 자손이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며 (삿 18:29) 이스라엘의 소생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라이스더라 (삿 18:30) 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이 백성이 사로 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이 일에 제사장이 앞 장 섰습니다. 거짓된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사람의 주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진지하게 살펴볼 것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있을 수 있고, 거짓 선지자의 모습을 분별하지 못함으로 일탈의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모습이 명확하게 드러난 것에 대해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아무리 큰 교회를 하고, 아무리 큰 능력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 모습 가운데 주님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고 부귀 명예를 꿈꾸고 하나님의 종보다 사람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거짓 선지자입니다. 우리는 따라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야 종말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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