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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25) - 룻기[9] 박석화 2014-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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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룻기3:6-13)

 

룻기 3장(2)

 

오늘은 기업 무를 자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을 통해서 나오미가 룻을 위해 최선으로 사랑과 헌신을 다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부인 룻을 위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동시에 이것은 나오미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무를 감당하는 일입니다. 나오미의 사랑에 대한 룻의 순종은 아름답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한대로 열매를 맺는 것을 보게 됩니다. 3장 초반에 보았듯이 나오미의 제안에 대하여 룻은 순종합니다. 이는 룻이 이미 1장에서 고백했듯이 어머니가 하는 대로 하겠다는 룻의 고백을 지키는 것입니다. 환경과 상관없이 순종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의 제안이라고 하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고 위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룻이 결혼 청혼을 하였는데, 이 결혼 청혼에 대하여 보아스가 거절한다든지, 부정한 여인이라고 징계를 하면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상황이 쉽지 않지만 룻이 시어머니의 말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봅니다. 룻이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로 오면서 서원하였던 모습이고, 또한 시어머니가 정당한 의무를 감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나오미의 헌신과 룻의 순종은 그 자체로 열매와 상관없이 아름답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교훈도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나오미와 룻에 행위에 대하여 평가를 담고 있습니다. 룻은 나오미의 말대로 보아스 이불 아래 누었습니다. 보아스가 자신의 발치에 여인이 누운 것을 알게 되고 깜짝 놀랍니다. 당시 문화에서 보면 결혼을 청혼하는 것인 동시에 성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지난번에 결혼하는 풍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모습 속에는 성적인 모습도 없자나 있습니다. 깜짝 놀란 보아스는 누구냐고 묻고, 룻은 침착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놀라운 것은 룻의 고백에 대해서 보아스는 화내지 않고 칭찬하면서 룻에게 자신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감당하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한 밤 중에 일어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르침을 세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기업 무를 자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기업 무를 자의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기업 무를 자에 대해서 이해가 잘 되어야 오늘 본문을 알 수 있고, 4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업 무를 자는 히브리어로 ‘가일’인데 문법적 변화를 통하여 ‘고엘’이라는 단어 입니다. 2장 20절에서 보면 ‘고엘’이라는 말은 구속자라는 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업을 무른다고 하는 것은 되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고엘 제도는 기업 무를 자가 가진 자의 의무가 있습니다. 친척 중에 가난하여 자신의 땅을 팔게 되면 이 가까운 친촉이 가난한 자를 위하여 땅을 구하여 주는 것입니다. 농경문화에서 땅은 곧 생명입니다. 땅을 팔았다는 것은 굶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족이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가까운 친족이 사서 생명이 유지 되게 합니다. 또 노예가 된 가족을 되사서 자유자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 후손이 끊긴 가족을 위해 후손을 이어주어야 하는 의무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타인에 의해 살인 당한 가족을 대신에 복수에 책임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나가게 되면 이슬람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성전으로 나가게 되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나가게 됩니다. 기업이 있었는데 잘 경영 하지 못하면 위탁받아야 잘 경영해야 하는 의무도 있습니다. 이는 공동체가 전체가 잘 살게 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 낙오되거나 한 사람이 모두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평균케 원리가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평균케 하기 위한 제도가 고엘제도입니다. 이 고엘 제도를 위해 친척 중에 가까운 자를 기업 무를 자라고 합니다. 고엘은 불운에 처한 친척의 책임을 대신 집니다. 이들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이 누구신지를 그림자로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의 남편 엘리멜렉을 따라서 모압으로 갔습니다. 모압으로 갈 때 몸만 갈 수 없습니다. 재정을 준비하여 가야 합니다. 다 팔고 갔을 것입니다. 가서 망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려니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금 공동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땅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오미는 엘리멜렉의 땅을 되팔고 살수 있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능력이 되지 않아 되 살수 없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땅을 살 수 있는 자격이 있었지만 땅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 땅을 대신 살 수 있는 자가 바로 기업 무를 자입니다. 그 공동체에서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어려움 없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교회도 이러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신약 성경으로 하면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라고 했습니다. 먼저 믿음의 형제를 돌아보고 다음에 이웃을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평등케 하는 원리를 가지고 다음에 이웃을 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 먹는 것을 굶는다는 사람이 있다면, 외부의 모든 것을 끊고 교회 안의 사람을 세워주고 나서 이웃을 돌아보는 것이 구제의 원리입니다. 이런 제도의 모습은 고엘 제도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아스는 고엘 제도의 책임을 가진 친족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고엘 제도의 의미를 잘 가지고 본문을 보면 나오미와 보아스가 이렇게 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볼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기업 무를 자의 보아스의 사랑과 온유합니다. 룻은 나오미의 명령대로 다 순종하였습니다.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모르기에 룻이 한 발 위를 내딛는 것은 얼음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개처럼 여기는 이방여인의 사는 삶이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룻은 시어머니 말씀에 온전히 순종합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11절입니다.

 

(룻 3:11) 내 딸아 두려워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보아스의 표현에서 이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상황이라면 룻에게 이러한 말을 하지 않았겠지요. 룻도 대단한 믿음 아니고는 어려운 것입니다. 어머니의 명령이지만 룻이 하나님 앞에 서있는 믿음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고 용기를 가지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용기를 의미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가는 길은 믿음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고 용기있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걸음도 룻이 가는 걸음과 같이 얼음위로 가는 삶입니다. 언제 얼음에서 미끄러질지 모릅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십시오. 많은 유혹과 함정이 있습니까? 한 번 잘 못하면 우리의 신앙이 무너집니다. 누구나 죄를 짓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가 있느냐 없느냐 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일로 본다면 우리가 사는 삶은 쉽지 않은 일인 것을 인식하며 가는 것입니다. 이를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가는 것은 온전한 순종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갈 때 우리가 예비하신 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의 길을 가다고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싸움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려움은 믿음의 길을 막는 가장 무서운 질병입니다. 그래서 중간에 포기하고 맙니다. 중간에 포기한다는 것은 신앙을 버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버리는 것이 맞지만, 외적으로는 교회에 다니지만 종교인으로 사는 자세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도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과 함께 살겠다고 가다가 지치면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으로 한 주 한 주를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은 결코 가벼운 길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쉬운 길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은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과 말씀을 부여잡고 걸어가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룻의 모습에서 이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룻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물론 나오미의 명령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명령한 것은 하나님이 재정하신 말씀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나오미에게는 이미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제도를 이뤄야 할 책임이 있었기에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할 지라도 인간적으로 볼 때 어떠한 상황이 주어질지 모르기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밤중에 깜짝 놀란 사건은 보아스에게는 물론이고 룻에게도 놀란 사건입니다.

 

(룻 3:8) 밤중에 그 사람이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웠는지라

 

한 여인이 자신의 발치에 누웠기에 놀랐습니다. 타작마당에 여러 사람이 오고 갔지만 보아스가 가진 위치와 재력에 의한다면 여기에 여인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룻 3:9)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여기에 대해서 룻이 담대하게 이야기 합니다. 저는 룻입니다. 그가 요구합니다. 당신이 기업 무를 자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 말은 룻이 당신 우리 가문을 살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혼 청혼입니다. 곡식을 줍던 이방 여인이 발치에 결혼해달라고 할 때 얼마나 황당할까요? 보아스의 태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반응합니다.

 

(룻 3:10)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 3:11) 내 딸아 두려워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책망하거나 그를 향하여 징계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을 합니다.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낫다고 합니다. 보아스가 룻을 향하여 너희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에 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애하고 하는 히브리 단어는 ‘헤세드’인데요. 헤세드라는 말의 일반적인 의미는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충성할 필요가 없지만 높은 자에게 낮은 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룻에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이렇게 말한 것은 룻이 보여준 신앙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룻의 처음 모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방 여인으로서 시어머니를 온전히 모셨던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시어머니를 따라와서 시어머니 대신하여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줍는 일을 대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업 무를 자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보아스의 눈에는 룻이 얼마나 믿음이 있는지 본 것입니다. 보아스 눈이 정확한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여인의 모습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연소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 온 것을 칭찬합니다. 왜 그럴까요? 나이 먹은 남자를 찾아온 룻을 칭찬하였을까요? 우리 식으로 생각하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돈 많은 남자,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나서 빨리 죽고 난 다음에 재산을 차지하는 드라마처럼, 나이 적은 여자가 나이 든 남자에게 가는 것이 칭찬할 거리입니까? 이는 기업 무를 자, 고엘 제도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기업 무를 것을 포기하겠다고 합니다. 기업 무를 자가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면 누구나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익이 되지 않기에 기업 무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여쁜 여인 있어도 기업 무를 책임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룻이 아이가 낳았다면 남자 아이는 보아스의 재산을 상속 받겠죠. 그런데 보아스의 가문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오미의 엘리멜렉 가문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엘리멜렉의 가문의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의 재산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왔다는 것은 보아스의 눈에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스가 아는 것입니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보아스가 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룻을 향하여 현숙한 여인이라고 칭찬합니다. 룻이 현숙한 여인으로 칭찬을 받은 것은 그의 지위가 격상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숙한 여인은 누구일까요? 현숙한 여인은 보통 가냘픈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가정을 살릴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그래서 현숙한 여인은 직접 나가서 경제적 활동도 합니다. 룻은 딱 맞지요. 가정을 살릴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믿음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잠언에서 보면 경제적 활동을 해서 가정을 살릴 수 있는 여인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숙한 여인이라고 하면 순종적인 모습을 생각하나, 꼭 그런 것 만은 아닙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룻은 현숙한 여인의 칭호를 받기 합당합니다. 현숙한 여인아라는 말은 유력한 자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입니다. 다시 말하면 룻은 유력한 자의 아내가 되기에 부족함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모습을 잘 보았습니다. 그에게 온유함으로 그녀를 하는 것입니다. 기업 무를 자의 온유함이라는 것은 우리의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우리를 온유하게 대하십니다.

 

보아스는 룻의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습니다.

 

(룻 3:12)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룻 3:13)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울지니라

 

우선 보아스가 한 일은 법적인 문제의 일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보다 가까운 친족이 기업을 무른다면 보아스는 그에게 우선권을 주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룻을 그 밤에 집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아침까지 누우라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보아스가 밤에 성적인 행위를 하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보아스의 성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룻이 밤에 가다가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가다가 보아스의 침상에서 나오는 룻을 보게 되면 사람들이 부도덕한 여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방여인 룻이 아침에 나올 때에 보아스는 보리를 많이 줍니다. 마치 보리타작으로 가져간 것처럼 보냅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봅니다. 기업 무를 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룻은 기업 무를 자의 삶에서 새로운 삶을 보게 되었습니다. 개처럼 취급받던 여인에서 현숙한 여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구속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기업 무를 자가 만나주었게 때문입니다. 만나 주었기 때문에 개처럼 취급받던 여인에서 현숙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유력자와 동등한 여인으로 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구속자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한하지 않습니다. 영원하신 분입니다.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용기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분 입니다. 우리의 구속자는 이러한 분입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분입니다. 마치 보아스가 룻을 향하여 다 책임져 주시듯이 우리를 사랑하신 구속주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고 책임져 주십니다. 누가 우리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 줍니까? 목사가요? 내 자녀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줍니까? 우리의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기업 무를 자입니다. 한 번 사랑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져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온유함은 끝이 없습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 나와서 죄를 고백하면 우리 주님은 온유하신 품으로 안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환경과 출신과 관계없이 믿음으로 순종하며 사는 우리의 구속주입니다. 무릎만 꿇으면 사랑한다고 받아 주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두려움이 있다면 사단이 주는 악한 바이러스입니다. 두려움이 한 번 들어오면 우리의 믿음이 휘청거립니다. 두려움은 의심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하게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룻이 구하여 자유자가 되었듯이 우리 주님을 날마다 찾는 자이도 합니다. 현숙한 여인은 청순한 여인이 아닙니다. 가정을 살리는 여인입니다. 교회를 살리는 여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는 현숙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나를 만나는 이들이 살아나게 되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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