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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26) - 룻기[10] 박석화 201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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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룻기4;1-12)

 

룻기 4장

 

오늘은 보아스가 기업을 무르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십자가 없이 면류관 없다’는 제목으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에게 소원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징계 받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지 않은가요?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지만, 제 자신을 볼 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존재인가를 생각해보면 두렵고 떨리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소망해볼 뿐입니다. 마음 한 구석에는 하나님의 복을 충만하게 누리기를 소망하여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 원하면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일을 싫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사악한 모습이라고 할까요? 간사한 모습이라고 할까요? 복을 원하는데 헌신을 좋아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헌신 없는 축복은 복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건 요행이고 어쩌면 로또 심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경은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무이 도식하는 삶을 꿈을 꾸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없음에도 우리는 이러한 삶을 꿈을 꿉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정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은 없고, 십자가 없이 면류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의의 면류관을 원하면서 십자가 지기를 싫어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십자가 없이 면류관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의 의의 면류관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고 영광의 문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천로역정에 고난의 언덕이라는 장면이 저에게는 각인되어 있습니다. 고난의 언덕을 넘어야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난의 언덕을 지나기 보다는 조금 더 빠른 길을 가고자 합니다. 이번에 수련회 갈 때 미시령 터널을 지나가면서 얻은 것은 시간이 단축되고 사고를 줄였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경치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아름답고 멋진 경치를 보고 싶다면 힘들지만 미시령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광의 문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영적인 고난의 언덕을 넘어야 합니다. 고난의 언덕을 넘지 않고 영광의 문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영광의 복을 누리는 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보아스의 모습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보아스가 룻에게 약속을 한 후에 약속을 지키는 장면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1-12절은 네 가지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4가지의 모습을 순서를 따라 보겠습니다.

 

첫째로 1-4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약속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 하면 책임 있는 신앙인이다. 자신이 맡은 책임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로 직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목사가 범죄하거나 실수를 하면 세상으로 엄청난 지탄을 받습니다. 목사는 사람이 아니냐 하며 항변할 수 있지만, 지탄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목사는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망갈 필요가 없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보아스는 룻기 3장 18절에서 이렇게 약속합니다.

 

(룻 3:18) 이에 시모가 가로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이 모습을 보면 나오미는 보아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 보입니다. 자기가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보다 상대방이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의미가 큽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어떠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나오미는 룻에게 잠잠히 기다리자고 말합니다. 보아스를 평가하는 모습 가운데 하나가 그는 자기가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생각처럼 보아스는 자신이 한 약속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기업 무를 찾고 증인을 세우고 마침내 약속을 성취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4절의 내용을 보면 보아스가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는 지 보게 됩니다.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서 앉았습니다. 성문이라고 하는 당시의 광장이고 재판하는 곳입니다. 성문에 올라가서 앉았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일어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보여줍니다. 그 때 마침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갑니다. 앉아 있던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에게 앉으라고 하였습니다.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하나씩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보아스가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약속을 다하기 위해 책임 있는 신앙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자녀로서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기 원한다면서 하나님 앞에 책임을 가볍게 여긴다면 얼마나 파렴치합니까? 부모가 되어서 자녀로부터 행복을 누리기 원하면서 자녀에 대한 책임을 못하며 부모입니까? 세상에 파렴치한 사람이 많습니다. 세월호 사건만 보아도 파렴치 한 부모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자녀를 버리고 갔던 부모가 보험금을 타기 나타나 생모요 생부요 하는 자들을 보게 됩니다.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며 복을 얻고 싶은 모습입니다. 보아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책무를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복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자발적 헌신을 통하여 약속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보아스의 모습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기업의 손해를 보지 않고 손해를 감당하려고 했습니다. 기업 무를 것에 대해서 보아스가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기업무를 자가 좋다고 합니다. 일거양득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젊은 아내도 가질 수 있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능력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 손해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보아스가 실제적인 문제를 내세웁니다. 재산상의 문제입니다. 재산상의 손해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5-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보아스가 말합니다. 당신이 기업을 무르게 되면 나오미에게 산 땅을 가지고 죽은 자의 아내 룻을 양육하고 그에게 난 자녀가 있다면 그 자녀에게 당신의 재산을 넘겨주어야 합니다.. 내가 이 말을 들은 이 사람은 황당한 것입니다. 내가 한 여인을 삼고 혹은 노동력을 삼을 기회로 삼았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도 주어야할 상황이 된 것입니다. 기업 무를 자에게는 이익이 없고 자신의 재산상의 손실이 있게 된 것입니다. 아들을 낳지 않으면 상관이 없지만, 아들을 낳으면 모든 재산은 엘리멜렉의 가문의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룻은 젊은 여자입니다. 얼마든지 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있습니다. 룻이 아들을 낳는다면 문제가 심각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을 낳지 않는 것은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를 속여서 동침하여 자녀를 낳았습니다. 자녀를 낳지 않으려고 했던 첫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죽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반드시 자녀를 낳아야 합니다. 그것이 기업 무를 자의 책무입니다. 그렇게 난 자녀가 있다면 재산은 다 넘겨주어야 합니다. 곧바로 내가 기업 무르지 않겠다고 합니다. 보아스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재산이 손해 볼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보아스는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마음속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동시에 한편으로 심각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기업 무를 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개’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아스는 이름이 기록되어 오고 오는 모든 사람에게 룻을 복되게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며 기억되었습니다. 그의 가문은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이 사람은 ‘아무’라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보며 저는 하나님께 아무 라고 기억되는 싫더라고요. 보아스는 재산상의 손해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산 상 손해를 감수하고 자신이 한 약속을 이행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얻기 원한다면 자발적 헌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나는 손해 없이 복을 얻겠다는 것은 파렴치한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까? 복음을 모르면 나는 손해 보지 않고 열매를 얻고자합니다. 일하지 않고 살고자 합니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읽지도 듣지도 않고 은혜의 자리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죠. 신앙생활이 길다고 해서 은혜의 자리 성숙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1년을 신앙생활을 해도 말씀을 읽고 기억하고 있다면 10-20년 종교인을 사는 것보다 더 깊습니다. 우리는 마치 긴 시간을 지났다는 것이 신앙의 성숙이 된다고 보장하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기억하는 것이 영적의 성숙의 기준입니다. 그 일을 위해 헌신이 필요합니다. 시간과 물질을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위해 내가 하고 싶은 것 조금은 손해 보아야 합니다. 손해 보지 않고 얻고자 하는 것은 도둑놈의 심보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도 불가능 한 것입니다. 손해 보더라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복 받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보아스는 백성을 증인삼아 기업무를 것을 선포합니다. 7-10절까지는 기업 무를 자에 대한 자세히 나옵니다. 신을 벗는 장면은 룻기가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증인을 삼는 것입니다. 내가 그 일을 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룻 4:7) 옛적 이스라엘 중에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의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제 나는 내 기업 무를 것을 보아스에게 넘기겠다고 아무개가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있는 곳에서 확증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당시 문화입니다. 영적인 가르침은 보아스의 자신의 헌신이 하나님께 정직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신을 벗음으로 기업 무를 자가 되었다는 것은 나오미와 내가 기업 무를 자라는 것을 만방에 공포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다가 손해가 되면 후회합니다. 가끔 어떠한 사람을 보면 어느 정도 되면 교회 분리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묻습니다. 그 사실이 교회에 정관에 있고, 교회 나눈다는 것을 공포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못합니다. 공포한다는 것은 정직히 그 일을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책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앞에 서약을 합니다. 세례 받을 때 서약하고 직분을 받을 때 서약한 것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지키라고 한 것처럼 지켜야 합니다. 모든 증인 앞에서 확증하는 모습을 통하여 보여준 것입니다.

 

네 번째는 11-12절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보아스를 보게 됩니다. 보아스는 하나님이 주신 법을 순종합니다. 보아스의 조상인 유다가 순종하지 않은 법이었습니다. 형사치수법이라고 하는 법입니다. 보아스는 유다가 다말에게서 난 베레스가 난 자손입니다. 유다의 셀레, 베레스, 세라 이 세 사람 밑에 그의 족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보아스 동네에 살던 사람들은 베레스 가문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형사치수법에 대하여 미더워함으로 창피를 당한 것을 창세기 38장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조상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았습니다. 조상의 실수를 만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것은 내 환경에 따라 기분에 따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보아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보아스에게 엄청난 복을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자리에 거쳤던 보아스를 향한 소리에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은 보아스의 별장에 축복을 합니다.

 

(룻 4: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

(룻 4:11)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첫 번째는 나오미와 룻을 향하여 라헬과 레아로 비유합니다. 이는 다산의 복을 이야기 합니다. 라헬과 레아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생깁니다. 당대에는 자녀가 많아지는 것이 축복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베들레헴에서 유명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부의 축복입니다. 세 번째는 베레스의 집과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베레스는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베레스의 후손은 보아스입니다. 이는 가문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보아스의 가문이 영원토록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때 백성이 보아스에게 축복을 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보아스가 이 복을 그냥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의 것을 감당할 때 주어진 것입니다. 보아스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줍니다. 한 사람을 살리고 한 가문을 사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보아스에게만 집중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보아스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업 무를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아스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우리를 향하여 하신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는 분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미쁨이 없다고 해도 주는 자신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실하시고 미쁜 분입니다. 그는 한 번 하신 약속을 끝까지 지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실하신 주님은 구원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다시 오실 약속도 지킬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하여 얻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전적으로 예수님 편에서는 손해입니다. 다 버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모든 손해를 주님은 감당하였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성령을 통해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한 모든 것을 알게 해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오심으로 예수님의 구원이 우리의 것이 되었음을 선언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3,36,38,41절 말씀, 이 모든 말씀을 보게 되면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으로 우리의 학증이 되십니다. 우리의 증인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이 완벽하였음을 성령 하나님 앞에서 선언하여 주십니다.

주님은 지극히 높임을 받았습니다. 주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극히 높아지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실제적으로 보좌 우편에 앉은 것이 실제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이 딸 끝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받으신 은혜였습니다. 세상 곳곳에서 그리스도를 높이고 있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주셨습니다. 보아스의 아름다운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얼마나 복 있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다 룻과 같이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은혜로 그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존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방인으로 멸망하며 슬펴하며 이를 가는 자가 되었을 텐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사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 삼아주심으로 그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다 룻과 같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의 은혜의 자리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멸망의 자리가 아니라 영광의 자리로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길일 때 나 같은 자를 별 볼일 없는 자를 불러주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담당한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믿음의 길을 가는 능력이 되고 힘이 됩니다. 오늘도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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