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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28) - 사무엘상[1] 박석화 201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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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사무엘상1:1-20)

 

 

사무엘상 1장(1)

 

오늘 본문을 보려면 역사적으로 본문을 보는 것과 강해적으로 본문을 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두 가지를 섞으면 좋겠는데, 준비하다보니 역사적으로 보지 않고 설교적 관점에서 본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인 본문이 말하고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금요 신앙 세미나는 구약 성경을 역사적으로 본문을 보는 관점으로 보기로 했는데, 오늘 그렇지 못해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20절이라는 긴 단락을 다루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사무엘서는 역사적 기록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사사시대가 끝나고 왕정시대가 시작되는 연결 고리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무엘서는 사무엘이 기록하였지만, 사무엘서의 주인공은 사무엘이 아니라 다윗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무엘서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이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통곡의 자리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은혜의 책이라는 것이 사무엘서입니다. 사무엘서를 이해하는 것은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한 부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한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의 모든 부분이 중요하지만, 사무엘서는 구약의 역사 가운데 왕정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창세기 1-11장까지를 원역사라고 합니다.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의 시대라고 해서 원역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12-50장까지는 초기 역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2-50장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부족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부터 여호수아 때까지는 부족에서 벗어나 민족의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여호수아 때까지 이르게 됩니다. 여호수아 때까지라는 것은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입니다. 가나안에서 정착을 하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가나안에서 여호수아는 그의 소명을 다 감당하였습니다. 히브리 민족이 견고한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땅이 없었던 유목 민족이었던 이들이 땅을 가진 자들이 되었습니다. 자기 나라 없이 떠돌던 유목민이 정착민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에게 맡겨진 소명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소명을 다 감당하였습니다. 문제는 여호수아 사후의 모습입니다. 여호수아 사후에 이스라엘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합니다. 3세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세대가 애굽의 시대라고 한다면 2세대는 광야의 시대입니다. 3세대는 가나안 시대의 모습입니다. 가나안 시대의 모습은 두 가지입니다. 여호수아 이전과 이후의 시대로 갈리게 됩니다. 3세대 이후는 여호수아 이후의 시대이다. 4세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애굽으로부터 가나안 시대에 아름다운 모습은 여호수아 이전에는 하나님을 신뢰했던 시대였습니다. 여호수아 이후의 시대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떠나 살기를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징계합니다. 그 징계 가운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호소하고 하나님은 다시금 그들을 구해내십니다. 그 시대를 사사 시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나 살고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구원해주십니다. 하지만 사사시대는 사사들이 한 시적으로 통치하였기에 불안한 시대였습니다. 사사 시대를 보여주는 것이 21:25절아닙니까?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불안전한 시대의 탄원은 새로운 시대의 열망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이 없었다는 것을 사사 시대에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사무엘상으로 들어오지 않고 룻기를 기록하였습니다. 룻기를 기록한 이유는 사무엘상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서의 주인공인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룻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상을 구속사적으로 준비하기 위해서 룻기가 사무엘서와 사사기 사이에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속사에서 룻기는 어마어마한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룻기를 기록하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이방 여인을 선택하였다는 것은 구속사적으로도 그렇고 하나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사사 시대를 지나고 왕정 시대를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이 왕정 시대를 준비합니다.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을 부르셔서 사사 시대를 마무리하고 왕정 시대를 준비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이스라엘은 이제 사사가 존재하지 않고 왕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이것을 사무엘이 매듭짓습니다. 왕정 시대가 시작됩니다. 사무엘상하, 역대상하는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가 끝나고 이스라엘이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니다. 그래서 식민지 시대가 오고 400년 동안 암흑시대가 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새로운 선지자인 요한이 나타나고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십니까? 선지자로서 제사장이요, 왕으로서 오신 분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구속을 위해 준비하였던 직분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됩니다. 구약의 긴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무엘서는 한 시대가 끝나고 부족이 왕국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천국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이 땅에서 비춰지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지보여주는 그림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무엘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무엘서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사사 시대만해도 이스라엘 백성은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사사와는 다른 시대지만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끌어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은 없었습니다. 지금의 사무엘서에 나타나는 왕정 시대는 전혀 다른 삶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무엘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때부터 오늘 우리가 아는 이스라엘이라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사무엘서를 통하여 하나님은 드라마틱하게 일하시는 것을 봅니다. 역동적인 역사적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 함께할 사무엘상 1장은 사무엘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한나가 통곡하고, 사무엘을 낳았다. 이런 서론에 지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사무엘상 1장은 사무엘상 전체의 주제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무엘서 1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하기를 사무엘서의 주인공은 다윗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서는 다윗의 출생으로 시작하지 않고 사무엘의 출생으로 시작합니다. 사무엘은 신정통치의 마지막 사사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원하는 왕의 사울의 시대로 이어집니다. 생각하여 보십시오. 사무엘서에 주인공은 다윗이라고 했는데, 왜 사무엘의 축생으로부터 시작할까? 이렇게 시작하는 의미가 무엇일까? 사울과 다윗은 왕이라는 측면에서 같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공통점은 사무엘이 세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없이 이스라엘 왕인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출생은 이스라엘 전 역사의 매듭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관성 때문에 사무엘서가 사무엘 출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하나씩 풀어가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통곡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사무엘상 1장의 시작은 아이가 없는 한 여인의 통곡으로 시작합니다. 이 여인은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1:8)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보통의 사랑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삼상 1: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남편 엘가나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브닌나의 그의 자녀보다 갑절을 주었습니다. 뇌물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뇌물은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없음으로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습니다. 엘가냐에게는 두 여인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니 일부다처제가 맞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시대의 모습입니다. 가정 제도의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타락한 열매의 모습은 분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브닌나는 아이가 있고 한나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브닌나는 아이가 있지만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한나는 아이는 없지만 사랑을 받았습니다. 한나는 아무리 사랑을 받아도 가슴의 한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아이가 없다는 것은 저주 받은 사람으로 취급당하였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눈에 우습게 여길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남아선호 사상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조선시대는 어떻습니까? 더 심하겠지요. 조신 시대의 사진을 보면 여성의 가슴이 보이는 사진이 않습니다. 이유는 남자를 낳은 어머니는 그렇게 하는 하고 다닙니다. 딸을 낳은 아이는 가슴을 숨기고 다녔습니다. 딸은 없고 데리고 가지 않고, 아들은 없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은 더 심한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무시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어서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이로 이한여 사라가 하갈에게 무시를 당합니다. 자녀를 낳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룻이 자녀를 낳았을 때 백성이 칭찬한 이유가 하나님께서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의 사랑을 받는 다고 해도 자녀가 없는 마음의 아픔은 지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한나의 아이 없음은 한나의 잘못도 엘가냐의 잘못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를 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여인, 아이가 없는 여인, 참으로 가슴아픈 모습입니다. 같은 집에 살지만, 한 마음이 아닌 다른 여인 브닌나로 하여금 서글픈 마음을 갖게 합니다.

 

(삼상 1: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이유를 잘 분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같은 집에 사는 데 어떻게 원수가 되었을까요?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심히 격동하고 번민하였다. 이는 화가 나고 온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사랑받는 여인의 모습입니다. 사랑을 받는 데 슬픔이 가득 차 있는 모습.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현실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한 여인의 통곡하고 격동하는 모습.

 

(삼상 1:7)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올라갈 때 남편과 함께 갔습니다. 브닌나가 격동시키니 한나는 슬픔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픔을 당하면 받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통곡하는 여인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구속하기 위하여 사실을 기록해 놓아야 합니다. 구속사적 관점을 보지 아니하면 성경을 모독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를 잘 생각하면, 통곡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통곡하는 여인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나의 통곡은 이스라엘의 통곡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떠한 나라입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나라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한 나라입니다. 승승장구하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지금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주인이 아니라 변방에 전락할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아서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 가나안의 전쟁에서 승승장구 하던 이스라엘이 지금은 왕이 없음으로 자기 소견에 따름으로 변방에서 빛을 잃어버린 상태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에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없애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명령에 순종에 않았습니다. 당장에 편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이전에 있던 사람과 함께 하면 조금 쉽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현실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발목을 붙잡고 가시가 된 것입니다.

 

(삿 1: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삿 1: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삿 1: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

(삿 1:30)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

(삿 1:31) 아셀이 악고 거민과 시돈 거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삿 1:32)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삿 1:33) 납달리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들이 그들에게 사역을 하였더라

 

결국은 이들이 이스라엘의 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이러한 가슴 아픔은 여호수아 사후 현실에 나타납니다.

 

(삿 2: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십 세에 죽으매

(삿 2:9)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삿 2:10)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삿 2: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삿 2: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결국 쫓아내지 못하니 나타나는 결과는 그들이 섬기는 우상이 된 것입니다. 죄악을 뿌리까지 없애야 하는데 그냥 두니 이러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씁쓸한 모습입니다. 이것 안하면 하나님의 진노에 서게 됩니다. 우리 노회가 죄악의 뿌리를 뽑는 일을 하나님 공의의 측면에서 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으로 하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가나안으로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각기 그 소견대로 행하였습니다. 각기 그 소견대로 한다는 것은 무질서하다는 것입니다. 무질서의 나라는 엉망진창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표현한다면 목소리큰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주먹 센 사람이 이기는 것이고, 돈 있는 사람이 주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교계에 가면 큰 교회 목사가 대장인 것처럼 말이죠. 질서가 무너지면 보이는 외적인 조건이 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받은 이스라엘이지만 의미없는 변방의 자리에서 절규하며 통곡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적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눈물의 인생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이었지만, 불행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대적들로 인하여 분노의 자리에 서게 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나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이를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지 아니하는 백성은 울며불며 통곡합니다. 한 여인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잘났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막으시고 닫으시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멋지게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가나안에서 지금 통곡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왕을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사람의 통치를 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주변의 모습들의 모습입니다. 주변의 대적들로 인하여 무시를 당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는 우리나라에도 의미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도 1907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변방의 종교가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땅의 왕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신뢰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여전히 사랑받는 교회로 남아있습니까? 우리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예수 믿음이 자랑으로 남아있습니까? 통곡하는 이스라엘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믿음의 가르침보다 이 시대의 가르침에서 서기를 좋아한다면 한나의 통곡처럼 우리도 통곡의 자리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고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사랑을 받았는데, 어디에 내놓아도 자신 있는데, 밖에 나가면 사람들에게 무시당고, 이 교단에 자랑이 아니라 창피만 당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서글픈지 모릅니다. 오늘 내 자신을 비롯해서 우리는 어떤가? 눈물 흘리지 않고 견딜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한나의 통곡, 이스라엘의 통곡은 우리의 통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이스라엘의 통곡을 생각하는 하나님과 천성을 가는 길에 반드시 넘어야할 언덕을 살펴보고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여 보겠습니다.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으 자녀로 살지만 세상 가운데 통고하며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기도하면 통곡이 아니라 기쁨의 자리에 서서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고, 교회는 다르다는 부러움을 줄 수 있는 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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