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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29) - 사무엘상[2] 박석화 201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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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사무엘상1:1-20)

 

 

사무엘상 1장(2)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을 통해 세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통곡하는 이스라엘, 이스라엘 통곡을 생각하시는 하나님, 천성을 향하여 가는 길에 넘어야 하는 언덕을 말씀드립니다. 사무엘서의 주인공은 사무엘이 아니라 다윗입니다. 다윗이 오기까지 어떠한 일이 이스라엘에 나타났는지 보여주는 것이 사무엘이고 또한 사사기와 다윗과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서의 전반부에 사무엘이 태어남과 사무엘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자라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고, 후반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에게 왕을 달라고 하는 상황이 주어지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왕을 예비하는 데 사울이라는 왕이 생기고, 사울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함으로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삼으신 것을 후회하고, 사울이 왕일 때에 그 다음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을 예비하게 됩니다. 다윗이 왕이 되면서 사울의 역할이 끝나고 다윗의 기사가 기록되어지고 다윗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사무엘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모습들을 보면 사무엘상의 초반부에 사무엘의 태어남을 기록함은 다윗 시대에 앞서 그의 길을 예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것과 같이 사무엘이 다윗이 오기 전에 자기 소견대로 있던 이스라엘 시대에 혼란은 잠재우고 질서 있는 한 왕 다윗을 예비하는 역할로 사무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을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무엘을 그렇게 표현될 수 없지만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장에서 사무엘이 태어남에 대한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무엘이 험난한 과정 가운데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시대의 모습 뿐만 아니라 지도자의 모습이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영적인 암흑기로 내려가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 한나의 모습은 기쁨고 즐겁고 행복한 모습이 아니라 통곡하는 여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유는 아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없다는 것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말이 포함되지만 자녀가 없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존재는 하나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일까요? 수치스러움을 당하는 것처럼 힘든 것이 없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할 때 나왔던 예가 생각이 나는데, 뺨을 맞으면 아파서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라 수치스럽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수치스러움 앞에서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한나는 자녀가 없어서 사람들 앞에서 수치스럽고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나라임에도 이방 나라에 싸여 있어서 수치스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난장판입니다. 서로 옳다고 하는 사회였으니, 제대로 된 사회였겠습니까?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지만 난장판인 나라. 수치스럽지 않습니까? 이러한 수치스러움을 하나님께 없애달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가다가는 아무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와서 한 일은 이스라엘의 수치스러움을 회복시켜주는 것입니다. 그 안에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일을 합니다. 한나의 통곡은 이스라엘의 통곡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내용입니다.

이제 두 번째로는 이스라엘의 통곡을 생각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통곡이 통곡으로 끝난다면 이처럼 비참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슬픔, 눈물을 생각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내가 보여주는 상황이 어렵고 힘들고 통곡하는 상황이라도 할지라도 절망하지 않겠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멸망의 자리로 가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악이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근데 하물며 자녀들이 멸망하는 것을 원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녀가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갖다 줄 아버지가 어디에 있겠느냐? 하물며 하늘에 계신 천부께서 너희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에서 통곡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통곡을 듣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한나의 결과는 슬픈 결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게 우리에게 소망입니다. 자신의 태를 열지 않는 하나님을 한나는 원망하지 않고 한나가 한 일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자신한 일을 다 토해내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 가운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가 하는 일은 먼저 하는 일은 원망하는 일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 침체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은 원망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뢰감이 있고, 분명한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토로합니다. 원망과 토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나의 모습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삼상 1: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냈다는 것입니다. 한나가 하나님 앞에 쏟아놓은 것은 자신에게 아들을 달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없는 수치스럼이 넘어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치스러움을 넘어가게 하신다면, 그 아이를 나실인으로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나가 다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없는 사람에게 아이를 갖는다는 것처럼 행복하고 즐거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만큼 한나가 당한 수치심과 고통이 얼마나 컸다는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한나는 자신의 모든 것을 토로하고 자신에게 아이를 준다면 나실인으로 바치겠다고 하였습니다. 나실인인으로 바치겠다는 것은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으로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나실인은 하나님을 위해 온전히 헌신된 사람입니다. 나실인은 구별된 사람으로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포도주를 먹어도 안되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을 떠나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자신의 태를 열어주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태를 열어주신다면 하나님께 헌신하겠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자녀가 이러한 모습을 가졌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본다는 것은 격차가 있지만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것이, 한나의 아름다운 모습인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진실 된 것을 다 토해내고, 하나님은 그 진정성을 본 것 입니다. 다 토해 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삼상 1:11)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를 생각하시고 라는 말은 기억하다는 말입니다. 나의 상황들을 잘 기억한다는 말입니다. 또는 하나님께서 잊지 않고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표현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중심을 보았습니다.

 

(삼상 1:19)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삼상 1:20)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셨다. 저를 생각하시며 토로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응답은 내가 너를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잊지 않았다는 열매로 사무엘을 주었습니다. 사무엘의 뜻은 ‘하나님이 들으셨다.’ 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표현인지 모릅니다. 한나의 통곡과 그의 순결한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태를 열어 사무엘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토로할 때, 하나님은 그의 중심을 보시고 찾아오심을 보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토로할 때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토로 한다는 것은 순전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순전한 상태에서 고백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토로하고 내려놓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들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사와 제사장들은 부패하였고 사람들은 자기 소견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사라진 시대였습니다. 결국 멸망의 자리로 떨어질 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한나와 사무엘을 통해 보는 것은 열왕기상에서도 보게 되겠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는 한 사람을 사용을 예비하십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는 것이지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고백하며 나아가는 한 사람, 상한 심령을 가진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들어주십니다. 상한 심령 없이 어떠한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통곡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공감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통곡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을 가진 한 사람, 통곡하는 한 사람의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수가 이루어 가는 것 같지 않습니다. 통곡하는 한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의 가정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상한 심령 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버리지 않습니다. 통곡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모든 것이 불의하게 흘러간다고 할 지라도 이 나라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루터기가 남아서 이 나라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우리 교회 입구에 싹이 난 것을 보십시오. 뿌리가 있으니 살아나더라고요. 한 사람이 있으면 열매가 있어서 싹이 돋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순전한 믿음을 가진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한 사람을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우리 민족에서 정말 통곡하는 한 사람.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정말 수치를 당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에가 이리저리 치이고 있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통곡하는 한 사람이 있으면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통곡이 가슴에 미어지면 터져 나옵니다. 통곡이 터져 나오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통곡이 터져 나오지 않으면 계속 두렵고 갈등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가져야 할 모습입니다. 상한 심령 통곡하는 심령. 이것이 우리 가족을 살리고 우리 교회를 살리고 이 민족을 살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살리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얻는 세 번째 교훈은 천성을 향하여 가는 길에는 반드시 넘어야 할 언덕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두 가지의 독특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한나의 모습을 통하여 한 집에 사는 브닌나를 통한 고통을 봅니다. 한 공동체에서 경험하는 아픔을 봅니다. 땅에서 삶은 다 불안전합니다. 완전한 삶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자의 적은 여자이라는 말이 있듯이, 가족의 적은 가족입니다. 공동체의 적은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서로 상처 안 받고 살려고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서로가 소통이 되지 않으면 아픔이 있습니다. 어떤 내용이 있으면 목사에게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할지요. 저는 투시의 은사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중심을 보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저도 여러분의 마음의 모든 것을 안다면 살지 못할 것입니다. 서로 속마음을 몰라서 감사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닫혀 사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소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 사이에서 겪는 것은 힘듭니다. 가까울수록 고통이 심합니다. 그러기에 이런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면 우리는 천성으로 가는 길이 매우 힘이 듭니다. 고난은 천성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넘어야 할 언덕입니다. 이것은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유혹이고 때때로 우리를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우리 주님이 말하기를 좁은 문을 통과하고 좁은 길을 가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늘 가야 합니다. 제가 상담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잘 알고 있지만, 부정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이런 말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이 옳지요. 힘들어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여야 삽니다. 우리는 힘들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두 번재로는 공동체 문제 뿐만 아니라 지도자를 통한 아픔입니다. 기도하는 한나를 보는 엘리 제사장의 모습을 봅니다. 통곡하는 한나에게 엘리 제사장은 그야 말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아픔을 줍니다.

 

(삼상 1: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삼상 1:13)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삼상 1:14)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술을 끊으라고 합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기도하는 한나를 향하여 술 취한 주정뱅이로 여긴 이 사건은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당한 당사자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해하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고 있는데, 당하는 것입니다. 살지도 않으며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하기를 복음을 함께 복음을 받으려먼 참 좋으려니와 너희 정욕을 위한 고난이라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엘리 제사장을 향하여 한나가 한 말은 15, 16절입니다.

 

(삼상 1: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삼상 1:16)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지도자가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엘리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나가 무엇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합니다. 지도자를 통하여 상처받을 수 있는데 지도자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싸우면 같이 망하는 것 외에 아무 득이 없습니다. 오해가 있으면 그대로 이야기 하면 됩니다. 저는 슬픈 여자입니다. 당신의 종을 악한 여자로 만들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 원통함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은 엘리 제사장이 당하는 것이지 한나가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자세로 있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 모습이 이런 모습입니다.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우리 모두는 다 부족합니다. 그래서 함께 만들어 가야합니다. 혼자 만들어갈 수 없습니다. 목사도 하나님 말씀을 수종을 드는 종일 뿐이지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한나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렇게 믿었던 제사장입니다. 오해를 받았으니 큰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였기 때문에 결코 그는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나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자들이 어떠한 어려움이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같은 공동체, 가족들에게 당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과 있을 때 얼마나 힘듭니까? 브닌나는 같은 신앙의 공동체임에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았습니까? 이것도 하나님을 향하여 갈 때 넘어야할 언덕입니다. 또한 반면에 지도자를 통하여 뜻하지 않는 아픔도 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 앞에 정직히 대면함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엘리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무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무지하면 백성들이 어떠하겠습니까? 지도자가 사악하면 백성도 사악해집니다.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사라진 시대의 모습은 자기 소견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엘리의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없으면 영직인 권위도 사라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영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투시의 은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충만해야 합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저에게 주어진 것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말씀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회복되지 않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사라지면 권위도 사라집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사라지면 소망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야할 길에 영적인 분별력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준비시고 다윗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회복하고 영적인 권위를 세위기 위해서입니다. 비로서 사무엘이 옴으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게 됩니다. 사울을 향하여 분별력 있게 이야기 합니. 왕이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닙니다. 순종입니다. 분별력입니다. 그리고 다윗이라고 하는 권위자를 세웁니다. 분별력 없는 사울을 낙엽처럼 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위로 세운 다윗은 위대한 나라의 왕으로 서는 것을 봅니다.

오늘 우리 민족에게 요구되는 것이 이러한 것입니다. 영적인 분별력과 권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바른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에 저는 좋은 휴식 시간을 가졌습니다. 원 없이 책을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살펴 본 것 중 하는 참 어려운 시대이다라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구나. 분별력이 사라지면 영적인 위기가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에 모두에게 주어진 명령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 앞에 세 가지만 적용하겠습니다. 사무엘상 1장의 내용을 통하여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우리도 통곡의 자리에 설 수 있음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우리의 연약으로 하나님과 배반하게 되는 것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통곡하는 자리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우리가 탄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하나님께 탄원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통곡하는 자리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통곡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소리를 다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다 토로하는 우리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준비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고 기도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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