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30) - 사무엘상[3] | 박석화 | 2014-11-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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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사무엘상1:21-28)
사무엘상 1장(3)
비가 온 뒤에 무지개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무지개를 보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아무래도 무지개가 주고 있는 의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지개는 희망을 보여줍니다. 무지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한 구속계획을 잘 보여주기도 합니다. 노아 홍수 이후무지개를 통하여서 더 이상 내 백성을 멸하지 않고 보존하겠는 사실을 보여준 놀라운 선물입니다. 희망이 없었던 백성에게 한나를 통하여 났던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무지개와 같습니다. 사무엘을 그 자체로 이스라엘에 소망을 보여주는 모습을 가진 것이죠.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하실 일들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그의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들어셨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살아가면서 가장 행복할 때는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한나는 이 표현을 하나님이 허락했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허락한다는 말은 참 좋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베풀어 주시는 소망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견에 따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소리는 하나님이 듣지 않고 있습니다. 잡음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 잡음은 울린다고 하여도 가치가 없습니다. 웅성거리는 잡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나의 기도요 그 열매인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의 출생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일하시겠다는 구속 계획을 보여주는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버리지 않고 강건한 자리로 이끌어 가겠다는 사건입니다. 사무엘의 출생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구속사의 진행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를 홀로 일하시지 않고 사람을 통해서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의 일이지만,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사람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의 나라를 이루어 가실 때 반드시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의 내용 역시 하나님의 일하심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일꾼을 준비시키고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 창조 이후 모든 일을 하나님은 부르시고 준비시킨 사람을 통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한나입니다. 하나님은 한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작은 여인이었습니다. 통곡하는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여인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 첫 번째 열매가 사무엘이고, 사무엘을 통하여 다윗이 예비됩니다. 궁극적으로 다윗을 향하여 가는 길 가는 데 두 사람을 준비시키는데, 한나고 사무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 이전에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지요. 하지만 큰 줄기에서 그의 시작은 한나였고 사무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나의 모습을 잘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됩니다. 사무엘상 1, 2장은 이런 한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중요하면 두 장에 걸쳐서 한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장은 한나의 기도가 길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엘리의 제사장의 아들들의 불의함에 대비시키면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이 사무엘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보게 됩니다. 한 여인이 기록이 성경에 두 장에 걸쳐 이루어져 있다는 것만 보아도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모습을 성경에 기록하여서 오고 오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한나가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1. 자신의 소명에 충실할 때 하나님 나라에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분명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명 의식 없는 자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분명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명 의식이라는 것은 목사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것도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이라고 하잖아요.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부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은사와 달란트를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소명입니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목사로서의 소명만이 아니라 직업인으로 소명도 정말 중요합니다. 가정을 이루시게 한 분명한 소명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나에게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사무엘의 출생은 한나의 통곡을 멈추고 가족의 화평도 가져왔습니다. 사무엘의 출생 이후에 엘가나의 집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아이가 없기 전에 그 집안에서는 브닌나와 한나 사이에 불화가 있었습니다. 엘가나에게는 아이 없는 한나를 안타까워하고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지만 결국 이는 가정에 불화를 만드는 원인으로 작동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을 얻고 가정에 참된 평화가 온 것입니다. 한나는 평화로운 삶을 만끽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무엘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나는 자신이 하나님께 사무엘을 선물로 받은 사살이 어떤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로서의 소명을 한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아이를 바치기 전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삼상 1:21)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삼상 1: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해마다 절기를 지키러 올라갔습니다.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3대 절기를 지키려고 가족이 함께 갔습니다. 한나가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아이가 젖 뗀 후 가겠다고 합니다. 참 의미 있는 장면입니다. 젖 뗀 이후에 한나가 이 아이를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젖떼기까지 이스라엘 사람은 2-3년 이라고 합니다. 3년 정도 아이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젖떼기까지는 단순히 젖만 먹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라서 듣지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이 아이에게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은 이후 사무엘의 모습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습니다. 2-3년 동안 아이를 양육하고 있고 절기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한나가 가진 욕심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남편 엘가나의 말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삼상 1:23)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남편 엘가나는 한나의 결정이 선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나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선한 결정을 하고 있음을 엘가나는 인정하는 것입니다. 엘가나가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엘가나 역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이루시기를 고백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정말 멋있고 복 된 삶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은 멋진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나는 이러한 소리를 남편 엘가나를 통하여 듣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말씀 앞에 온전히 서 있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바르게 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가지고 사는 자들은 자신의 욕심에 얽매여 살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 주시기를 원한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똑똑한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은 소명이 분명한 자입니다. 주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기뻐하시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이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교회와 성도가 있을 때 그 교회와 민족은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소명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변함없음 믿음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쓰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간사함을 잘 보여줍니다. 어렵고 힘들 때는 주를 찾다고 편하고 쉬울 때는 게을러 집니다. 그래서 저는 루이스의 말처럼 고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가폰과 같다는 말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도 듣지 않으니 메가폰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일관성이 없는 사람들을 말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어떻게 너는 들어갈 때 나올 때 다르냐? 어떻게 손바닥 뒤집듯이 쉽냐? 부정적인 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자들이 이루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은 변함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한나의 모습 가운데 이 모습이 분명합니다. 사무엘이 누구입니까? 어떻게 얻은 자녀입니까? 온갖 수고와 고난 가운데 통곡 가운데 얻은 자녀 아닙니까? 아이가 없으면 얼마든지 약속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기만 하면요.’ 그런데 아이가 생겼습니다. 그래도 변하지 않고 약속을 이루어갈 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지요.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하는 것이죠. 갈등이 생기고 영적인 싸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병 든자가 병만 나으면 하나님께 헌신하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번만 물질의 복을 주시면 주를 위하여 헌신하겠다고 합니다. 한 재미있는 글을 보았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교회에 한 분이 오셔서 3억 5천만을 헌금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광주를 갔다 와야겠는데 차비를 주시면 헌금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분은 차비를 주었으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을 주면 내가 하겠다고 하는 것은 매우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거짓된 모습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건강이 주어지고 물질이 주어졌을 때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떠나는지 모릅니다. 조금 어려우면 주여 라고 하지만 상황이 호전되면 내가 언제 그랬냐고 합니다. 다 알면서도 반복적으로 그런 일을 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성공할지는 모르지만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존재들이 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보다 더 자신 소견이 우선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정치인이 되고 법관이 되고 공무원이 되는 것이 끔찍합니다. 한나는 달랐습니다. 그는 변함없는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과 모욕과 어려움 가운데 얻은 사무엘을 젖떼기까지 양육하고 젓을 뗀 후 3살 밖에 안되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이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삼상 1:24)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이런 어린 사무엘을 부모의 품을 떠나 보내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한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을 한나는 지켰습니다. 어떻게 얻은 아이라고 한 번 봐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는 간절하였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6장 24절 말씀을 잘 애용합니다.
(엡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저는 이 말씀 앞에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가족들을 우리 성도들을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때로는 화도 나지요. 속상도 합니다. 이런 마음이 생깁니다. 이러할 때 변함없는 모습으로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은 변함없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뻐하신다고 하는데 변함없는 믿음과 마음, 열정 가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때로는 너무 힘들어 좁은 문 좁은 가야 합니까라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변함없이 말한 대로 산다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쉽고 편한 길을 찾아볼까요? 이런 갈등도 생깁니다. 우리 인간이 변함이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나를 보면 변함없는 한 여인의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 소망을 주는 통로가 됩니다. 한나 자신에게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어린 나에에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는 고통. 인간적 고통이 있었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한 약속이 더 소중하였습니다. 무슨 결정을 할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서약한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십시오.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해야 살 수 있습니다. 이런 한나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삼상 2:21)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세 아들과 두 딸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주는 것이 복인데 이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한나의 축복이지 이스라엘의 축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변함없는 믿음을 소유한 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우리의 재능과 지식이 아닙니다. 변함없는 믿음입니다. 변함없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3. 신실 헌신이 도탄에 빠진 백성에서 소망을 줍니다.
이제 우리는 한나의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왔습니다. 저는 이 장면 이스라엘 민족의 소망을 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상 1: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삼상 1: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한나는 사무엘이 누구에게 왔는지 잊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왔다는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반응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왔다는 것은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하나님께로 온 것을 알았기에 드리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로 온 것을 알았기에 드리는 것에 감사하였습니다. 한나의 신실한 헌신을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의 아픔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기 보다는 오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산 것입니다. 하지만 한나는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왔다는 고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아무리 소중하다고 할지라도 분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소망을 줄자가 준비되었습니다. 좋은 학교, 친구, 공동체, 직장,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십니까? 내가 고생해서 얻었습니까? 만약에 후자가 된다면 내 것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자기 만족이 있고, 자신감을 넘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쁨도 없고, 참된 영광도 없고 참된 소망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들은 모든 것을 주로를 위해 줄 수 있는 자입니다.
(삼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한나의 신앙 고백입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아무리 내 손에 있는 부로 살 수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한 순간에 없어지게 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의 삶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구나. 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하면 나의 삶이 달라지겠지요 자랑과 허영에 살지 않고 어떻게든 내 은사와 달랄트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할 것인가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고백이 한나의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신실한 헌신 하나님이 이렇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소명과 변함 없는 믿음과 신실한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꾼 삼으로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시고,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무엘의 출생과 그의 양육, 하나님이 주시는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구속의 놀라운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데,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동신에 하나님 백성들을 향한 언약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한나와 사무엘을 통하여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혼란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망에 빛을 분명히 보여 주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는 불빛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어둡고 침침합니까?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 밝히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두운 세상에 소망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소망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통하여 소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아는 일에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것이 분명하다면 각자 주어진 소명을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나를 자녀로 부르셨다면, 나에게 은사와 달란트를 주셨을 텐데, 그것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 소명은 은혜의 방편을 부지런히 사용할 때 알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성례가 이루어지는 예배에 열심과 간절히 배우고자 할 때 알 수 있습니다. 뭏?#65533;?방편을 사용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소명이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보내주신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소명이 분명해 집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생과 동료와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은 반드시 이 방법을 통하여 일하셨습니다. 그 모습은 제자라는 이름이었습니다. 다 제자라는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도록 하십니다. 교회에 목사를 세운 이유도 여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잘 사용하지 않으면 손해는 찾지 않는 자에게 있습니다. 나중에 슬피우는 것도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성장의 방편으로 들려지다보니 제자화라는 것이 식상해 지는 것이 안타까운 것인데 성경이 가르치는 모습입니다. 때로는 소명이 힘들고 어려우서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마음이 생길 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 우리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신다는 약속, 이 기억하면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길에 포기하지 않고 갈 수 있습니다. 침체에 빠지면 약속을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다시 살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렵고 힘든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그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똑같은 것은 하나님 사람이 필요하였고, 그 사람은 한나였고, 다윗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저와 여러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일꾼 도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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