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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31) - 사무엘상[4] 박석화 201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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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사무엘상2:1-10)

 

 

사무엘상 2장(1)

 

오늘은 한나의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11절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린 시절에 명절을 기다리고 소망을 했을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언제 설날이 오나?’, ‘언제 추석이 오나?’ 명절을 기다린 이유는 돈을 받는 날이라서 좋았고, 노는 날이라서 좋았습니다. 희한하게도 명절은 다른 날 보다 빨리 지나 아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이 기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삶에 활력소를 가져다줍니다. 기쁨이 안에 있으면 생가지 못한 힘을 나타납니다. 기쁨이 사라지면 삶의 활력소도 잃지만, 몸도 덩달아 활기를 잊고 건강을 잃게 됩니다. 기쁨이 내 안에 있으면 삶의 활력소도 찾지만 덩달아 몸도 활기를 찾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쁨을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삶의 모습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삶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적인 기쁨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쁨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느냐와 기쁨을 가지지 않고 신앙 생활하느냐는 않느냐는 다른 차원의 신앙생활을 만들에 냅니다. 예수를 믿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영원한 형벌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나로 새로움 삶을 살게 하는 것이고, 영적인 활력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영원한 멸망 가운데, 영원한 형벌 가운데 내가 자유함을 얻었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처럼 흥분되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러한 기쁨과 행복이 지속되지 못할 때, 우리는 열정 대신 냉랭함이 자리 잡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의 기쁨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의 삶을 사는 것 무기력해 집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열정적이고 뜨겁게 살 수 있는 근거는 구원의 기쁨 때문입니다. 구원의 기쁨이 있느냐, 없느냐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열정적으로 사느냐 무기력한 삶을 사느냐는 구원의 기쁨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만약에 교회를 다니고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구원의 기쁨이 없으면 하나니의 자녀로 결코 살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나안 성도’에 말을 하는데, ‘가나안 성도’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많은 고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기쁨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떠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교회라는 곳은 유형을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무형의 교회, 우주적인 교회를 말하는 것이라면 유형적인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이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논의들이 우리 시대에 있고, 앞으로도 더 많은 논의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한 번 더 생각을 하면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가진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헌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있는데 단순히 종교인으로만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고, 자신의 만족을 채워주지 않는 교회를 떠나 자신의 만족을 채워줄 수 있는 교회를 가는 건 합당한 일인가? 어찌 되었든 우리의 현실은 이러한 모습이 많이 나타나리라 생각합니다. 구원의 기쁨이 있는 자와 구원의 기쁨이 없는 자가 교회에 공존할 것이고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의 기도는 우리에게 큰 의미를 줍니다. 한나의 기쁨은 다른데 있지 않고 구원을 주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오늘 기도의 내용을 보게 되면 한나의 열정, 뜨거움, 거룩한 흥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한나가 지금 뜨거운 열정과 하나님을 향한 충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한나의 충만한, 뜨거움, 열정적인 고백은 무엇인가? 1절에서 볼 수 있는데, 구원을 주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한나는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현재 자신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때문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할 때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구원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지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나의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한나의 가슴에서 들리는 통곡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비웃음을 잠잠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한나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고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에는 눈물이 닦아졌고, 그의 가슴에 흐르는 통곡이 멈추었고, 사람들의 비웃음은 잠잠해 졌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동일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니의 구원이 임하면 작지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가지지 않아도 뜨거운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얼마나 행복한 가를 이 한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문, 이러한 행복을 알고 있으십니까? 한나의 기도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구원의 기쁨을 가진 자에게 이러한 행복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통하여 받은 구원의 받았다는 고백을 하였을 때, 행복이 기억이 나십니까? 그 행복을 지금도 가지고 있으십니까?

얼마 전에 가평 남이섬에 가볼 일이 있었습니다. 남이섬 자체가 저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남이섬 입구에 수련회를 했었습니다. 제가 그 수련회 장에서 만났던 하나님을 잊을 수 없습니다. 기쁨, 감격이 그 자리를 지나가는데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내가 살면서 그런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있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나의 기도는 구원 받은 삶이 얼마나 열정적인가를 보여줍니다. 한나가 고백하는 것은 한나 자신의 것만의 것이 아닙니다. 한나의 구원의 기쁨은 구원 받은 자의 모두에게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기쁨을 얻었느냐, 죄의 세력으로 자유 함을 얻었느냐. 사망의 결박으로부터 해방되었느냐,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가 되었느냐, 기쁨과 감격을 가졌느냐? 그러면 오늘 한나의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한나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고 오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뜻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오고 가는 모든 사람에게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소중합니다. 이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말씀을 통하여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한나의 기도는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한나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나의 기도를 통하여 구원 받은 나의 기쁨이 어떠한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금 나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1절만 살펴볼 텐데요. 1절에서는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기쁨의 일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여호와의 인한 즐거움입니다. 1절에 ‘여호와를 인하여 내가 즐거워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고백 가운데 분명하게 나타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 한다는 것은 구원의 열매이고 증표입니다. 구원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을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을 보면 에베소 교회를 향한 책망 가운데 너희 첫 사랑을 흘려보냈는지 기억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즐거워했던 것이 바뀌어서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따르는 욕망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다. 이것이 구원의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정 열정적인 삶의 모습은 하나님만을 즐거워하고 하나님만을 기뻐하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행복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을 먼저 즐거워하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을 잃어버리면 그 자리에 다른 것으로 채워지겠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즐거워하는 것이 사라지면 다른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다르기에 하나로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사라지면 우리 안에 열정, 뜨거움이 시들어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요리 문답 1문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로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합니다. 영원토록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강력한 도전자가 있다면 돈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나이가 들면 돈이 큰 세력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식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영원토록 즐거워한다는 것은 변함이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들은 변함없이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땅에서 영원토록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영원토록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려주고 이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의 기쁨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환경 가운데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그의 삶이 결코 무기력해질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힘이 듭니까? 우리 시대처럼 경제적 압박을 받아 힘들어 이상한 일을 할 수 있지만, 정말 이런 압박의 상황 가운데 열정적으로 살 수 있고, 무기력하지 않고 뜨겁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즐거워 할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즐거움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그러한 즐거움은 우리의 육체를 잠시 행복하게 해주나, 우리를 영원토록 즐겁게 해주지 못합니다. 우리 육체를 말초적으로 즐겁게 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게 하지 못합니다. 교회를 떠난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교회가 재미있으면 좋겠는데 재미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보니 많은 사람들이 교회는 재미있어야 한다고 하며 가끔 이벤트를 하거나 찬양들을 즐거움을 유발시키기 위해 사용할 때 속상합니다. 사람들은 딱딱한 강의보다 개그를 좋아합니다. 내 삶의 문제를 고민하고 나누며 기도하기보다는 우리끼리 신변잡기 같은 이야기만 하자고 합니다. 한 모임에 갔었는데 각 자의 삶의 모습에서 열정적으로 사는 친구들을 보았습니다. 그 모임에서 한 시간 반 동안 한 이야기는 세 가지 이었는데, 하나는 아이였고, 두 번째는 스포츠였고, 세 번째는 부부 이야기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생각한 것은 개별적으로 뜨겁고 열정적으로 사는데, 한 시간 반 동안 모여서 할 수 있는 것이 이런 것들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개인적으로 깊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이런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깊이 있는 나눔을 회피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모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을 사람들의 즐거워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한나의 고백은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시편 기자는 이러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여러분, 주님 앞에 있을 때 기쁨이 충만하고 영원한 즐거움을 보십니까? 하나님을 대면할 때,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주의 앞에 있는 기쁨, 주의 우편에 있는 영원한 즐거움, 참 멋있는 고백이 아닙니까? 영원한 즐거움을 소유하고 있는 얼마나 멋있는 삶입니까? 비록 삶이 어렵고 힘들어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영원한 기쁨이 내 앞에 있고, 영원한 즐거움이 내 우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뜨겁게 만들어 줍니다. 시편 기자가 이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시73:28)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수없이 많은 고난과 고통 가운데 참된 안식을 누릴 곳이 있습니다. 바로 주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와 함께 하는 것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즐거움이 커질수록 우리의 삶은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나가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안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 구원을 생각할 때 다른 어떤 것이 세상에서 즐거움이 주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 사라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지 않습니다. 구원 받은 자에게 분명히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구원 받은 자인지,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자인지 아는 것은 무엇으로 인하여 즐거움을 얻는지 점검해 보면 압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가진 물질이 있으면 즐거워하고 없으면 시무룩하고, 내가 건강할 때는 즐거워하고 없을 때는 무기력하고 내가 어떠한 열매가 있을 때는 즐거워하고 없을 때는 무기력 한다면 세상 사람과 나와 다른 점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를 통해서 볼 때, 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존재요.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존재다. 이 땅에서 살아질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있을 곳에 살아가는 존재라고 한다면, 나의 상황, 나의 환경과 상관없이 나는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무기력해지거나 절망에 빠지거나 나약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것 위에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지만, 나는 하나님 한 분만 만족하며 산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 환경 가운데 발돋움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기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이 높여주심에 대한 즐거움입니다. 한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인하여 높아졌다.’ 뿔은 힘과 권력 왕권을 의미합니다. 내 뿔이 여호와로 인하여 높아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높여주셨다는 것입니다. 한나 첫째 부인이었는데 둘째 부인에 의하여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애통하며 살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첫째 부인의 자리를 되찾은 것입니다. 낮아진 자신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높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나의 기쁜이지만 구원 받은 모든 자의 기쁨입니다. 구원은 낮아진 자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모습을 통하여 분명히 증거 합니다. 빌립보서 2장 8-11절을 보면 주님은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혀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모든 만물이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구원이란 낮아진 자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멸망 가운데서 높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형수에서 왕자가 된 것입니다. 구원은 낮아진 자에게 높아진 것입니다.그 어떤 자들도 스스로 높아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여 주셔야 합니다. 구원의 기쁨입니다. 내가 높여졌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내가 외적인 조건과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상속자 되었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습니다. 당장 가진 것이 없어도 앞으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행복한 것입니다. 저도 가끔 가진 것이 없을 때 속상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라질 것인데 나에게는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것이 주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 같은 자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은 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엄청난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춤출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나의 기도요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세상에 대하여 담대해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크게 열렸다는 것은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한나였습니다. 이 한나가 하나님의 은혜로 담대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담대하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세상에 대하여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쁜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구원의 기쁨이 나를 사로잡을 때 가능합니다. 성령이 나로 인하여금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해 지면 세상에 앞에서 담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원수들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렸던 입술이 열려서 담대하게 불의를 꾸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의 기쁨이 충만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백성이 드러나는 것이 있다면 이러한 영적인 담대함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세상에서 환난을 당해도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시편 144편 15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시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이 복이 있도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주관하시고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고 나의 주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담대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지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세상 앞에서 담대하지 않았습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금 신상에 고백하지 않겠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주시고 구원시켜준 은혜가 분명한 사람은 세상 앞에서 담대하게 이행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앞에서 입이 닫힐 경우가 많습니다. 전 그런 경험 종종 해봅니다. 어떤 자리에 복음을 전하는 자리가 어려웠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월요일이 그랬습니다.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당이 아닌 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주어졌기 때문에 복음 앞에서 담대하게 전해야 하는 데 많이 떨렸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잘 못합니다. 두렵습니다. 떨리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앞에는 엄청난 공권력이 버티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쉽지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입을 열어서 담대하게 증거 하게 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자리에 설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담대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한다면, 구원의 기쁨을 가진 세 가지의 모습을 한나의 기도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높여주심을 아는 것입니다. 나 같이 낮을 자를 높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앞에 담대한 것입니다. 배운 자들 앞에서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있는 자들 앞에서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힘으로 성령의 힘으로 담대하여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기 때문에 가진 자들 앞에서 주눅들 때가 있습니다. 배운 자들 앞에서 주눅 들 수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 앞에서 주눅들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이길 수 있는 구원의 기쁨을 이길 때입니다. 바울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자라고 하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이 있기에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나만의 모습이겠습니까? 바울만의 모습입니까? 동일한 성령이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보이는 것에 의하여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에 주눅 들지 마시고, 성도 힘, 구원 받은 기쁨을 가지고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멋지게 달려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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