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32) - 사무엘상[5] | 박석화 | 2014-11-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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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사무엘상2:2-6)
사무엘상 2장(2)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결같이 소망하는 것은 능력 있는 신앙생활하고 싶은 것일 것입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표현처럼 나의 신앙생활이 냉랭한 것이 아닌 열정과 헌신을 가지고 있는 믿음 생활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내가 능력 있고 헌신이 있고 열정 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 믿음은 스스로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된다고 하는 것은 사단의 지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반드시 여기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필요한데, 그것이 무엇일까? 능력 있고, 활기 있고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싶을 텐데, 어떤 것이 있어야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다양하게 이야기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지혜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지혜는 영적인 삶에 대하여 티끌만큼도 알려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않는 자의 삶은 다릅니다. 땅을 바라보는 삶과 하늘을 바라보는 삶은 다릅니다. 믿음의 시련이라는 책을 보게 되면 그리스도인들이 일관성 없는 삶에 대하여 유익한 글을 읽으면 많은 동감을 하였습니다.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인데, 일관성과 능력 있는 삶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사람들은 세상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통하여 답을 얻으려고 하지만 거듭난 사람은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정직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의 소리를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가르침은 우리 질문에 대하여 답을 제공하여 줍니다.
(롬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롬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바울은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이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구원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의 능력이 있으면 여러분의 가족과 형제, 친척이 생각나지 않겠습니까? 좋은 것이 있으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주겠지요. 그래서 멀리 있는 사람은 나중에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기쁘고 즐겁고 가까운 사람이 생각나고 그 사람에게 신경을 씁니다. 땅의 것도 그런데 영적인 선물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달라질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그런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놀라운 소식이 있는데, 이 소식이 너무 소중한데, 자신은 이방인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인생 아닙니까? 생각해 보니 내 동족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바울이 정말 원하는 것이 있는데 내 동족이스라엘이 정말 구원을 받기를 원한다. 이스라엘을 보니 안타까운 점이 있는데 그들은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은 아니다 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종교적인 행위에 있어서는 열심히 있지만 구원 얻는 믿음을 갖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절기와 율법의 삶은 잘 지켰는데, 구원 얻는 믿음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을 받는 근본은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고백에 있는데,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 스스로 종교생활을 하는 것에 만족하였습니다. 열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구원 얻는 지식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운 모습이겠습니까? 하나님 입장에서 얼마나 기가 막히지 않겠습니까? 앞에 밥이 있는데 다른 것을 먹는 것입니다. 이것을 먹어야 하는데 다른 것을 먹으니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주님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말씀을 보면 영생, 구원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아는 데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종교적 생활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구원받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배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생에 이르는 길은 스스로가 알려주신 대로 가야 합니다. 영생을 얻는 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떻게 아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알려주신 방법,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의구원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다고 하는 것은 신약에서만 하는 것이 성경 전체에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게 되면 한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정확하게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통하여 오고 오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너희에게 알려주는 나의 모습이 이것이라고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가 고백한 하나님이 나라고 알려주시고, 오고 오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구원얻는 지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나는 매우 연약한 여인이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어렵게 삶을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연약하게 보였던 한나는 연약한 외형과 연약한 삶 속에 있었지만 연약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조건은 연약하였는데 실제 삶은 강건하였습니다. 우리도 보게 되면 연약하지만 강인하게 사는 것을 보면 깜짝 놀랍니다. 보기와는 다른네 라고 말이죠. 재미있는 예를 들자면, 축구 운동을 하다보면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볼 때는 축구를 잘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데 골은 잘 넣는다. 보이는 것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비보다는 공격을 시킵니다. 한나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보이는 것은 연약하고 상황도 연약한데 강인한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이 그로 강인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한나 고백 속에 있는 하나님의 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과 정확한 고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시련 가운데 강인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시73편의 설교 가운데 믿음의 시련 가운데 있을 때 이해할 수 없을 때 믿음의 길은 하나님의 집으로 가라. 하나님의 집으로 가서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고 그 말씀대로 살라고 합니다. 우리의 주어진 말씀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군지 알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상호아 가운데 하나님의 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울었습니까? 하나님의 집에서 울었습니다. 어디서 통곡했습니까? 하나님의 집에서 통곡했습니다. 어디서 회복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집에서 회복받았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은 믿음의 시련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이길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집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성소가 있다면 신약에는 광야 교회를 대신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울고 하나님의 집에서 통곡해야 하나님의 집에서 회복받는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바보같은 것이 없습니다. 스스로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한국 교회의 위기 가운데 있는 것은 아무데서나 예배드리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스스로 믿는다면 하나님이 무엇 하러 교회를 세우셨겠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기성교회를 비판해서 자신들끼리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부르지 않는다. 모여서 무엇하냐고 물으면 말씀을 나눈다고 합니다. 그러면 누가 말씀은 나누냐고 하면 한 사람을 정해서 말씀을 나눈다고 합니다. 결국 그 사람이 목사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라고 부르지 않을 뿐입니다. 기성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도 결국 교회를 세우는 일밖에 없습니다. 정확한 방법으로 세우지 않으니까 건장한 신앙으로 성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통곡하였고 하나님의 집에서 응답받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분명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건강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입술을 통하여 우리도 동일하게 지식의 자리, 믿음의 자리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지식이 없는 신앙은 매우 위험합니다. 스스로 믿는 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알려주신 말씀, 계시라고 하는 구원의 지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지식을 떠나서 어떠한 체험이든지 신비적인 일들에 심취해서 생활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아는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근데 지금 난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12월에 우리나라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여 교회 전체가 떠난다고 합니다. 황당무계합니다. 천국가려고 예수 믿는 것 아닙니까? 바울이 하나님께 가고 싶다. 죽는 게 소원인데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준 일이 때문에 지금 내가 사는 것이다. 죽는 것이 무엇이 좋으나 너희 때문에 산다고 합니다. 가끔 두통이 올 때 생각합니다. 그럴 때 생각합니다. 나중의 삶을 생각해봅니다. 죽음을 피하는 것은 무슨 신앙일까요? 어떤 삶이 가장 바보 같고 한심할까요? 선교사님의 삶이 그러할 것입니다. 고생하러 떠나 죽으러 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정직하게 하나만 생각해도 이런 엉뚱한 짓을 하지 않지요. 어느 한 여자 전도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종교 무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필아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7장의 말씀처럼 선지자가 아니라 선지자 노릇하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정직한 모습이 있으면 이런 자리에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나의 입술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신가?
첫째로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절을 보면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고백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가장 많은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신구약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동그라미 쳐 보십시오. 가장 많이 기록된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한결같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여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심이란 죄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죄와 격리 되고 무관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표현 앞에는 더 이상 죄와는 격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죄와 함께 논의될 수 없는 것입니다. 거룩은 온전한 성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심에는 죄를 미워하심에 대한 고백입니다. 죄 짓는 것 외에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죄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고백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이러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에 흠 있는 제물이 아니라 거룩한 제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 정신은 예배 때 들어옵니다. 우리는 예배는 제사가 아니지만 정신은 같습니다. 거룩함은 동일한 것입니다.
(레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정신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합니다. 거룩함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모세 오경을 통해 가르쳐 주신 이 정신은 늘 한결같이 선지자를 통하여 전해주었습니다. 구약을 보면, 율법서가 있고 성문서가 있고 선지서가 있습니다. 율법서와 선지서로 본다면 선지자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합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주께서 눈이 정결하다는 것은 거룩하시다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예수님입니다.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거룩하신 아버지여 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가장 많이 고백하는 것이요, 믿음의 선배들이 고백했던 모습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한국 교회난 우리의 신앙이 무너진 이유는 거룩함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이 유혹을 가장 많이 받습니다. 온갖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거룩함을 훼손하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의 거룩함이 훼손될 때 낙심, 후회, 속상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은 우리의 거룩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하여 또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주 밖에 다른 이가 없으시다고 합니다.’ 여호와는 유일하신 분이다. 주밖에 다른 이가 없으시다.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그는 반석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다고 합니다. 반석이라는 의미는 돌덩어리입니다. 산과 바위에 대해서 선지자들이 대상으로 놓고 고백하는 것이 많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산과 바위는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산은 영원히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성이라고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하고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에 대한 한나의 고백은 분명하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거룩은 죄와 단절되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심에 그림으로 실제적으로 보여준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 자신이 죽으심으로 죄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룩함을 통하여 하나님은 거룩하지 못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가 구원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죄에 대해 무관한 분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우리의 구원을 확실하게 만들어 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고백할 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셨고, 그래서 내가 거룩하게 부르게 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참 복음을 받은 사람은 구원에 있어서 흔들릴 수가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내 구원의 고백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나는 거룩하게 살겠다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받은 백성이요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살전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심에 대한 고백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이것이 날마다 고백해야 할 내용입니다. 2절에서 한나의 고백은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이 고백만 있어서 우리의 삶의 어려움과 시련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고백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믿음의 열매를 먼저 보여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영원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고, 영원하고 변함없으신 분이십니다. 반복해서 말합니다. 우리의 고백하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변함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한나의 기도에서 얼마나 풍성하게 하나님에 대해 고백하는 지모릅니다. 여러분도 기도할 때 하나님에 대한 풍성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이 내 구원의 기쁨,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우리는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시련을 이기고, 죄와 싸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는 만큼 진리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우리의 삶을 잘 돌아보면서 허나의 기도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입술로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입술의 고백은 삶을 동참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십니다 라는 것 동시에 내가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고백과 삶이 함께 되지 않으면 온전한 기도가 되지 못합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스펄전 목사님의 말씀이 너무나 다가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는 거룩하지만 교회 일을 할 때면 마귀처럼 바뀌처럼 변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으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원론적 삶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삶과 기도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하게 살게 하옵소서. 이러한 고백이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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