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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33) - 사무엘상[6] 박석화 201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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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사무엘상2:3-6)

 

 

사무엘상 2장(3)

 

오늘은 한나의 기도 가운데 지식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 살펴보았던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한나의 삶 전체를 휘감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두 번째로는 한나가 고백하는 하나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삼상 2: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지식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지식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 전지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 지식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기에 지식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까? 우리가 기도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지 지식의 하나님이라고 기도하지 않자나요. 내 입술로 기도한다는 그 안에 하나님에 대한 충만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충만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내 입술을 통하여 충만한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고 충만한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은 만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충만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부 상담하는 데 가면, 종종 이러한 질문을 합니다. 남편에 대해서 장점 20가지를 써보라고 합니다. 단점 20가지를 쓰라고 합니다. 참 신기한 것은 빨리 쓰는 사람이 매우 적은 반면, 거의 못 쓰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 부부 생활을 하며 함께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장점 20가지를 이야기하는 데 주저 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결혼의 연수의 차이가 없더라고요. 신혼부부라서 많이 알겠지 했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고 살겠어?’ 라고 했는데 충만하게 쓰는 것을 봅니다. 결혼 생활이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우리가 생각할 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에 대해 장점과 단점을 충만하게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겠습니까? 그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충만한 마음을 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고백도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나는 거룩하신 하나님, 반석이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한 후에 지식의 하나님의 이라고 고백합니다. 지식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분명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신다고 이야기합니다. 달아보신다는 것은 저울질 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동은 외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을 저울질 한다는 것은 외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3절 초반에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것이며 오만한 너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라고 하는 것을 볼 때 행동을 달아보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외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의 소리 속사람의 모습까지도 하나님은 달아보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의 중심까지도 아시고 살피신다는 것입니다. 정직한 것인지 불의한 것인지 아는 것입니다. 한나가 고백하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외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내적인 모습을 다 안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제 앞에 섰을 때 어쩌겠습니까? 일단 거짓말을 못하겠지요. 이런 모습을 생각해 보면 나를 안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욕도 하고 화도 내고 분도 내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 그러지 않은 척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 안다고 한다면 끔찍할 것입니다. 모르니까 감출 수 있지요. 하나님 앞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를 다 모르실거야 라는 생각으로 감추고 죄를 짓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시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할 때가 죄를 짓는 순간입니다. 오늘 한나가 무엇이라고 말하냐면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외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내적인 모습도 다 안다고 고백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한나의 삶의 모습은 늘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갈 곳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숨을 곳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갈 곳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우리의 내면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 앞에 드러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떨 때 피곤하게 느껴질까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하여 봅시다. 지식의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사실이 나에게 편하게 다가오는 사람과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한나의 입장에서 불편한 사람이 아니죠. 한나는 하나님 앞에서 편하게 나가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마음이 생길까요? 그것은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때입니다. 내가 실수해도 이해하고 용서하고 기다릴 것을 안다면 불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의 모든 것을 다 아는 하나님 앞에 선다고 했을 때 회개하지 않고 단 하루라도 설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살아갑니까? 어제 저녁에 아빠는 어디서 그러한 열정이 생겼냐고 딸이 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시간이 너무 아깝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열정이 식힐 줄 모른다.’ 이런 말을 하면서 조금 뜨끔하기는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열정을 가지고 사는가라는 것에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적극적으로 나갈 수 있고, 내가 실수하고 죄를 짓는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시 하나님 앞에 나가 힘을 얻고 반복적으로 죄를 짓지 않고 나에 주어진 시간을 아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이것밖에 안 되요.’ 라고 하나님께 아뢰지 않겠습니까? 부족한 것이 많다고 아뢰며 나가지 않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것밖에 안 됩니다. 맡기는 것입니다. 교만하거나 오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배울 만큼 배웠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모습을 보면 너무 멋있는 기도입니다. 지식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멋진 고백이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삶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내가 구하는 것에 대한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아시기에 내가 구하는 것에 대하여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하십니다. 가장 선한 것으로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식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가지고 있기에 주의 일을 하다가 실족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을 하다가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 지식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낙심한다는 것은 어떤 말일까요? 마음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낙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삶을 살면서 낙심하는 이유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 불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낙심될 때가 많았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사단은 우리에게 시험을 합니다. 낙심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마음이 낙심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순간입니다. 지식의 하나님에 대해 망각하는 순간, 지식의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하지 않는 순간 낙심하게 됩니다. 낙심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봐 주지 않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마치 나 혼자밖에 없는 것과 같고 되는 것은 없는 것 같고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고, 어제까지 나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도 돌변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적 없었습니까? 우리가 낙심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지요? 바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지식의 하나님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의 나되게 하는 하나님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낙심하지요? 하나님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복음송 가운데 기도할 수 있는 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는 하는데 하나님이 없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염려 걱정이 옵니다. 우리에게 낙심이 오면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한나가 기도하는 것은 자신의 삶 속에 고난과 고통과 눈물의 시간을 보낼 때 하나님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자나요? 그런데 사람한테 버림 받은 것 같은 상황에 처하여 있었지만, 한나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무엘을 얻고 난 뒤에 분면하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입니다. 내 중심을 달아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행동을 알아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길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셨고 나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이 고백이 얼마나 멋있는 고백인지 모릅니다. 그러기 우리가 어떤 일을 하다고 실족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이처럼 힘 있고 능력 있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 믿는 복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지식의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나를 다 아시는 하나님, 나의 힘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다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복과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생각해 볼수록 감사하지요. 우리가 힘들고 연약할 때라도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끝까지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 생각해보면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삶입니까? 예수 믿는 우리들처럼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산 사람 어디에 있습니까? 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사나요? 얼마나 복되고 아름답게 삽니까? 그런데 우리는 살자나요. 얼마나 복되고 아름답게 삽니까!

 

또한 지식의 하나님의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교만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게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데 어떻게 까불겠습니까? 시간이 갈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세상의 지식이 이렇게 많이 쌓여있는데, 내가 나는 지식은 손때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책으로 내는 것을 보면 이렇게 공부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고, 대단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참 부럽습니다. 내가 좀 안다고, 내가 읽었다고 자랑할 것이 없더라고요. 지식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느 누가 자랑하겠습니까? 인간에게도 별 볼이 없다고 인식을 갖는데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자랑하고 지껄이겠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 당연히 교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식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있으면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뿐만 아니라 지식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우리를 얼마나 충만하게 하는지 겸손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입술의 열매는 입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열매로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지식의 하나님이십니다. 정확하게 정직하게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위하여 정직한 신념으로 임하였다면 세상의 어떠한 소리에도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식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한나가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서 자신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고 있지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 고백입니다. 바울이 바울되게 하는 것은 바울 자신이 아니라 세상의 지식, 능력, 권력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를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가 나로 하여금 나되게 살게 하였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멋진 고백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 나의 외적인 행동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나의 중심도 돌아보는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고백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이라는 고백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식의 하나님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만의 자리로 나가지 않습니다. 실족하거나 교만한 자리에 있을 때, 우리의 삶의 한 순간에 나의 나 되게 하는 하나님을 망각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제가 잊어버렸습니다. 내가 자랑하고 교만하고 오만하였습니다. 다시 회개하고 지식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능력 있는 삶을 살게 하고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이 땅에 보내진 인생 가운데 최고의 복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여기 오신 또 하나의 복을 누리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의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복을 충만히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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