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34) - 사무엘상[7] | 박석화 | 2014-12-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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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사무엘상2:4-8)
사무엘상 2장(4)
오늘은 4-6절까지 살펴볼 텐데요. 한나의 기도를 계속 살펴볼 텐데요. 한나의 기도를 볼 때, 한나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1절에서 보면 하나님을 향하여 고백하기를 거룩한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만큼 우리의 신앙을 풍성해 지는데, 한나가 고백한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3절에서는 한나는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지식의 하나님이라는 한나의 고백를 우리는 사무엘상 2장 1-3절에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4-6절까지를 살펴보면서 한나의 고백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바로 역적의 하나님을 살펴보겠습니다. 4-6절을 보면 한나의 분명한 고백이 나온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옛날에 이런 말을 자주하며 살았습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 불가능할 곳에서 가능함이 일어날 때 우리는 이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 속에서 흘러가는 말은 ‘개천에서 용 날수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는 자신하고 있는 것은 세상의 구조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편에서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강의를 듣고 왔습니다. 고려대학교 장하성 교수라고 한국 자본주의라는 두꺼운 책을 쓰신 분이데 강의의 초청을 받아서 긴 시간 강의를 들으며 재미있는 통계 하나를 보았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차이인데요. 미국은 대그룹과 대부자가 된 사람을 보게 되면 78명이 창업을 했다고 합니다. 상속부자는 22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반면에 한국은 창업을 해서 재벌이 된 사람은 22명이고 상속해서 재벌이 된 사람은 78명입니다. 완전히 반대이죠. 미국과 우리의 차이가 무엇인가? 미국은 할렘이나 가난한 사람 가운데서 스스로 준비해서 재벌이 되었고, 재벌이 된 사람 가운데 상속이 되어 재벌이 된 사람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창업한 사람은 22명인데 상속 재벌은 78명이니 우리나라 구조에서 보게 되면 개천에서 용 날 수 없는 것이죠. 있는 놈에서 있는 자식이 잘 사는 것이 한국의 구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조를 보면서 우리도 바뀔수 있지 않은가? 바뀔 수 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가에 따라서 삶의 모습이 바뀐다고 긍정적인 의미에서 강의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많고 지표로 보아서 한국은 엉망진창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개천에서 용 날수 있는 구조를 낳는 것은 사람이 변화되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예수 믿는 분은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떠나서라도 오늘 한나의 기도를 보면서 또 다른 생각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자를 통하여서는 사람들에게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가능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낮은 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손에 붙들리면 가진 자와 있는 자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변화를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우리의 인생이 1막으로 끝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인생이 1막으로 끝난다면 재미없지요. 여러분이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수 없이 많은 변화의 모습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이야기하지요. 내 삶의 변환점이다. 내 삶을 한 번 전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변환점은 생각할 때, 여기까지 내 인생의 1막이었다. 이제부터 내 인생의 2막이 시작된다고 종종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계속 올라가는 인생, 또는 계속 내려가는 인생은 잘 없습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하는 것이 굴곡이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1막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2막도 있고 3막도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굴곡 가우데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해 어떠한 고백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삶 가운데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나가 이런 상황 가운데 역전시키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정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모습. 생각하여 보십시오. 삶이 평탄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고난이 따라온다고 합니다. 고난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 믿었으니 고난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그러한 삶이 없다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고난 없는 삶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고난의 과정을 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을 어떻게 통과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고난 없는 삶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다고 자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여정 가운데 역전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삶에 대해서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역전시키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오늘 나의 삶에 교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땅 밑으로 떨어뜨릴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은 역전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게 합니다. 한나의 삶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나는 어떠한 삶이었습니까? 한나는 바닥까지 떨어진 삶 아니었습니까? 눈물로 점쳐진 인생 아니었습니까? 인생이 끝났다고 그가 생각했다면,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고백하였을까요?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도 한나의 신앙으로 볼 때는 눈물이 흘리지만 하나님께서 선한 뜻이 있다고 그의 인생을 끝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나는 그러한 삶으로 나타난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한나의 삶을 역전시켜 주셨습니다. 4-8절 다시 볼까요.
(삼상 2:4)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삼상 2:5)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삼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여러분 제가 이 말씀을 두 번 읽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말씀에 대한 여러분의 고백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만났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정말 이런 하나님이십니까? 우리는 본문에서 다양한 삶의 역전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용사와 넘어진 자의 역전입니다. 용사는 강함, 능력을 말하고, 그 강함의 대표로 말하는 것은 활입니다. 용사의 활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활이 아니라 그 활에 맞아서 살아남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용사가 가지고 있는 활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용사의 활이 날아가게 되면 그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용사의 활은 용맹의 표시가 됩니다. 용사의 활이 있는 백성은 아픔을 당하지 않지요. 누가 감히 쳐들어 올 수 없겠지요. 마치 우리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각 나라마다 핵폭탄을 가지고자 하나나요. 마치 지금 핵폭탄을 가지고 있으면 못 건드리는 것이죠. 작은 나라도 핵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나라들이 넘보지 못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가까이 있는 북한아니겠습니까. 이 핵무기를 통하여 세계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고대 용사의 활은 오늘날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삶을 보호해 줄 뿐 아니라 그 공동체를 지켜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 용사의 활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용사의 활은 꺾이고, 그 활이 꺾인 것입니다. 꺾인 활은 가치가 없지요. 날아가지 않을 뿐아니라 꺾인 활을 맞아 죽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용사의 활이 꺾였다는 것은 그 힘이 소멸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있고, 의기양양한 힘의 근원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었습니다. 넘어진 자라고 하는 것은 소망 없는 자를 이야기 합니다. 힘없는 사람이 넘어집니다. 우리의 발에 힘이 없으면 넘어집니다. 넘어지는 것은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와서 밟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넘어진 자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누구만 넘어져 있습니까? 구걸하는 사람이 넘어져 있지요. 운동 경기에서 누가 넘어지죠? 패자가 넘어집니다. 축구 경기에서 진 사람은 넘어져 웁니다. 그러나 이긴 사람은 펄쩍펄쩍 뜁니다. 넘어진 자가 그런 것입니다. 힘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패배자라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넘어진 자가 띠를 띤다는 것은 힘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완전 역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힘 있는 자는 영원이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힘 없는 자가 영원히 힘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용사의 활을 꺾으시는 분이요 넘어진 자를 일으키시는 분이다. 이것이 바로 역전의 하나님에 대한 한나의 고백입니다.
두 번째로 음식과 자녀의 문제에 있어서 역전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을 봅니다. 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생각해보세요. 부유한 계층과 배부른 사람들이 품을 팔 이유가 없지요. 유족하다는 것은 배부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품을 팔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품을 팔게 되었습니다. 또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주리던 사람은 계속 주리더라고요.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것이 너무너무 힘이 듭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제 정신으로 부채를 갖지 않고 집을 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이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지금 자본주의 구조를 몰라서 그래요. 하나님도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는 힘을 못 쓰실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만큼 자본주의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유족하던 자들이 품을 팔게 될 것이다. 높은 자들이 내려가게 될 것이다. 주리던 자가 더 이상 주리지 않을 것이다. 주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유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배고품을 누리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사람이 배고프지 않고 등만 따뜻하면 절망할 일이 없습니다. 그 때 그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고프고 추우니 정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 주리지 않는다. 이것이 한나의 고백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이런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의 환경과 상황을 보면 주리던 우리의 삶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삶을 역전시켜 주리지 않는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나고 감사한 일입니까. 반면에 유족하던 우리의 삶이 한 순간에 품을 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만한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진 것, 있는 것, 배운 것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 역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돈을 갚는 것과 쓰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 차원에 우리나라 부자들은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철학도 없고 돈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데 반면에 서구에 부자들을 보면 멋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래도 그 나라에 있는 기독교의 긴 역사가 그들 가운데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나누어 주는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논평하는 어떤 하는 어떤 분의 이야기인데, 한국에서 부자가 되는 것은 자기가 열심히 벌어서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내 돈 가직 내가 벌었는데 왜 남을 도와주냐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서 서구의 부자들은 특별히 빌게이츠를 예를 들어 이야기하기를, 빌게이츠의 말을 빌려 말하기를 내가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회가 나에게 그만큼 기회와 교육을 제공해주었기에 이렇게 되었다. 그래서 내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다. 그래서 사회에 환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자식들이 부자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환원을 하니까 거기에서 부자가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마치 내가 다했다는 것처럼 바보스럽고 한심스러운 것이 없죠. 그리스도인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 주셨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한나를 끝까지 지켜주시잖아요. 하나님의의 손이 나를 붙잡아 주시잖아요.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붙잡아 주시고 나를 놓지 않고 회복시켜 주시잖아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인 아닙니까? 그렇게 된다면 나의 가진 것이 나의 욕심과 욕망을 위해 쓸 수가 없고, 그것이 내 힘으로 했다고 교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하나님이 그를 가차없이 처단해 버릴 것입니다. 한나가 그렇게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한나는 자녀가 없는 자신의 모습 가운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자였지만 한 순간에 자녀를 많이 두었다. 자녀가 많아졌다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한나는 복 받은 여자야. 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좋은 소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신은 복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더니 당신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네요.’라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기분좋은 소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한나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한나는 많은 자녀를 둔 자녀는 쇠약하도다. 쇠약하다는 것은 병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질 하는 존재가 되었으니 얼마나 의기소침하게 되었겠습니까. 사람이 많이 가져도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살 맛이 나지 않습니다. 없어도 인정받으면 신이나지만 인정받지 못하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한나의 고백입니다. 역전의 하나님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고백입니까!
세 번째 한나는 생명의 문제에서 역전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 음부에 내리기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 도다라고 하십니다.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내가 이 시간에 생명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생명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 생명을 붙잡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생명을 붙잡고 계시는 것입.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들에게 왜 생명을 나두셨습니까? 죄의 열매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생명을 가진 자가 생명을 나눌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저들에게 어떠한 삶을 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우리를 남겨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의 의 때문에 되는 것 아니잖아요. 우리는 죽은 자였는데 살아났자나요. 우리의 생명과 능력과 조건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죽이기고 살리기도 하십니다. 죽이는 것은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버려 두시기도 하시지만 살리기도 하십니다. 로마서 1장에서 저들을 내어버려두사 하나님을 향하여 영화롭게 하지 않는 자들을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여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나를 돌이켜보면 하나님은 살리시기도 죽이시기도 하는 구나.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기에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다.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변화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사회적인 부분입니다. 8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역전입니다. 한 번 부자는 영원한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우리나라 속담이 옳은 것 같습니다. 부자는 3대는 못 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 말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시대는 부의 세습을 통해 한 번 부자는 영원한 부자라는 생각을 갖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한 분이십니다. 왜곡되지 않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는 하나님입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진토라는 것은 빈핍한 모습. 다시 말하면 쓰레기 처치장 같은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찮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으키면서 귀족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개천에서 용 나는 정도가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운 모습입니다. 가난한 자라를 일으키시고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역전의 하나님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세상을 가지고 떵떵 거릴 귀족들 뿐만 아니라 별 볼일 없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주십니다. 이 고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나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그 기도를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나는 그런 하나님을 만나고 그런 하나님과 평생 동행하였습니다. 오고오는 믿음의 후손들에게 하나님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너희 만나는 하나님 누구인지 아느냐? 너희가 만나고 있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느냐? 역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상황과 환경과 상관없이 역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것이 예수 믿는 자의 목인데, 이 복을 발로 차면되겠습니까? 하나님의 고백이 분명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나가 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있었기에 그 어렵게 난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고백이 없이 어떻게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온갖 수모를 겪고 낳은 아들 아닙니까? 그 아들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역전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있었기에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한나는 놀라운 것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지금의 모습이 내일의 모습이라고 단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쓰레기 더미에서 보석을 만들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인생 로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여러분 어렵고 힘든 상황 가운데 있다면 이런 상황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주셨는가? 이런 생황 가운데 내가 반응하는 나의 신앙의 모습을 잘 살펴야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내 신앙을 훈련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훈련이 없이 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훈련 받기를 싫어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훈련 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은 이런 상황을 주시는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 가운데 어떻게 사는 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원망하고 분노를 가지고 불평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 원망하고 불평하고 화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만들어준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영적으로 충만한 가운데 설 수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영적 상황을 살필 수 있는 것은 예수 생명만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변함없이 사랑합니다. 때때로 우리의 삶이 너무 힘들어서 바닥에 떨어진 것 같지만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떠날 수 없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인데 어찌 하나님을 떠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거든요. 이런 상황 가운데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의 모습이 이러한 것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주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높여주셨습니다.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였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낮아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였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의 모습에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 손에 붙잡혀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끝까지 회복시켜 주십니다.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합니다. 역전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가진 이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나가 세 가지를 고백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지식의 하나님. 역전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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