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성경연구(152) - 신명기[38] | 박석화 | 2012-08-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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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신명기 27:1-26) 신명기 27장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신명기 27-28장은 신명기에서 저주와 축복을 선언한 중요한 장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말씀 중 가장 많이 설교된 본문 중 하나가 신명기 28장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신명기 27장의 설교는 많이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27장이 없이 28장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주의 산 에발산과 축복의 산이 그리심 산에 이스라엘 백성을 둘로 나누고 그 사이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아멘”하며 분명하게 고백하게 합니다. 분문이 주어진 배경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어떻게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6장까지는 그들이 지켜야 할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율법을 선언만 하면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기록으로 남기면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전하였습니다. 그것을 말로 한 것이었습니다. 기록으로 남겨놓지 않고서는 잊어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너희가 들어가서 할 이일이 돌에 다가 석회를 바르고 율법을 돌에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록하고 석회를 바르라고 하는 것은 오랜 시간동안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목할 것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율법을 돌에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8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9절-10절에서는 순종의 모습을 말하고, 11절부터는 율법을 기록한 이후에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과 저주의 산인 에발 산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나누어, 기록한 율법을 낭송하게 합니다. 양 쪽에 각 지파를 각각 나누어 그리심 산과 에발 산과 이스라엘 백성이 서서, 레위지파가 이야기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아멘”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에발산 저주를 선언한 것에 대하여 아멘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전체의 내용입니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하는 말씀인 동시에 우리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사람과 말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만일에 하나님 말씀이 시대에 따라 의미가 변한다고 한다면 영원한 말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인데, 영원하신 분이 쓰시는 분은 영원하십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상황과 시대가 변하여도 그 말씀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부패한 존재이고 부패한 존재를 회복시키는 것은 하나님 말씀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말씀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살리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해서 3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기준이라는 생각으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돌에 기준을 세우라고 합니다. 1. 삶의 기준을 분명히 하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새로운 환경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전혀 다른 기후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의 모습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기준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입니다. 광야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애굽에서는 어떻게 살았느냐? 바로 이 기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환경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고 기준이 다릅니다. 살아가는 삶의 기준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맞이해야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인데, 너희가 따라야 할 기준은 하나이다. 삶의 기준은 말씀의 기준에 따라 거룩하게 살고, 모든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환경, 문화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문화와 상황이 다르고 서로 떨어져 있다고 할찌라도 삶의 기준이 같은 사람은 한 형제와 자매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세계를 다니면 인종이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른데, 그 곳에서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같은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소망이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필리핀은 대부분 천주교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도 천주교 비슷한 개신교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단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있는 필리핀 교회들은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교회가 많습니다. 그리고 필리핀 사람의 속성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고 나누는 것이 힘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필리핀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만 이 민족이 살 수 있다고 하는 분들이 적은 수였지만 있다는 것입니다. 필리핀 서점에는 간증집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석에 보면 정말 좋은 책들이 있는 것입니다. 적은 수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살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고한 고백을 가지고 있고, 말씀이 우리를 살릴 수 있고, 우리의 삶의 유일한 기준을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기준이 분명한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이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혼합주의가 되는 것이고 가나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난 다음 삶의 기준이 분명하지 않으면 이방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에 석회를 바르는 것은 대대로 지켜야 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말씀을 배우는 일에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나오는 것에 대해서 순종하려고 몸부림 쳐야 합니다. 큰 돌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는 것은 삶의 기준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기준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로 정체성을 분명히 가져라 신 27:9-10 모세가 레위 제사장들로 더불어 온 이스라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아 잠잠히 들으라 오늘날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돌에 명백하게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돌에 기록해 기준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을 볼 때마다 나의 삶의 모습과 나의 정체성과 삶의 기준을 분명히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교회에 십자가 탑을 세웠던 것은 삶의 모습이 나타는 곳이 교회입니다. 나의 삶의 기준이 십자가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백서이 되었으니, 말씀을 지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불 빛이 켜있으면 교회구나라고 생각합니다. 큰 돌에다 말씀을 새겨 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지, 의미가 없습니다. 기념일 뿐입니다. 기준이 내면화되지 아니하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죽은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돌판을 세운 뒤, 모세가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되었다면 하나님 백성답게 행해야 합니다. 돌판에 기록된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가 나의 주님이라는 단지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예수가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야 하고 말씀이 나를 지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에 들어가고, 내가 내 자신이 되어 질 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많이 이야기 한다고 하여도 성경에 좋은 내용을 도구로만 가지고 있다면 아무 의미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배할 때, 나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말씀을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하라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 세우고, 말씀을 하나 하나 읽어갑니다. 이렇게 말씀을 조목조목하게 읽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신 27: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 우상 숭배는 저주 받는다. 아멘. 오늘날 우리의 우상 숭배는 무엇입니까? 우상 숭배는 저주 받습니다. 아멘 하라는 것입니다. 저주 받는 것은 누구 때문에 받습니까? 나로 인하여 받는 것입니다. 아멘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는 다고 하였습니다. 신 27: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는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신 27: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지계표라고 하는 것은 땅의 경계표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각자에게 땅이 주어졌습니다. 원래의 땅은 하나님의 땅입니다. 지계표를 옮기는 것은 땅을 샀다는 것입니다. 땅을 샀다는 것은 삶의 터전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이 되면 그 땅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해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 교회의 지체들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 가운데 쓸 만큼만 남겨두고 가지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오늘날에는 부동산 투기 같은 것입니다. 집은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머무는 곳입니다. 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집이 하나 더 생기면, 세를 준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나갈 때까지 쫓아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스위스는 나갈 때까지 월세가 오르지 않는 다고 합니다. 그래서 10년, 20년, 30년 산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화가 생긴 것은 그리스도인 때문에 생겼다고 합니다. 30년을 보내고 있어도 자기 집인 것입니다. 정말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투기 하지 마십시다. 하나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혹 부모님이 남겨주신 집이 있다면, 가난하고 힘든 사람을 위해서 남겨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우리가 안하면 다음 세대가 힘듭니다. 투기 안했으면 자녀들이 집 얻느라고 고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땅 주인이 아니라고 해서 집만 생겨만 바라는 생각을 가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서 거주할 집 하나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이후에 소경을 잃게 하는 자,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 성적인 타락을 하는 자, 무죄한 자를 살해하는 자들에 대해서 저주를 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모두 다 아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각 장애인이 길을 잃게 되게 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놀리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시각 장애인은 육체적으로 장애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 가볍게 여기는 것도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서 자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반드시 임합니다. 역사를 보면, 사법부가 공의를 상실하며 그 나라는 망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아멘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가! 우리의 기준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이 기준을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세대에 거룩한 기준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 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에발산의 저주 앞에서 우리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를 두렵고 떨림으로 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고백하였던 삶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게 하여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각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세우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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