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성경연구(182) - 여호수아[18] | 박석화 | 2013-04-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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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여호수아20:1-9) 여호수아 20장 오늘은 도피성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모세 오경을 보게 되면, 도피성에 대해서 많은 내용들이 여러 군데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기21장, 민수기35장, 신명기4장, 신명기19장, 여호수아 2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피성에 관한 이야기를 간단히 생각해 보자면, 이스라엘 지파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난 뒤에 각 지파별로 성읍을 배분받게 됩니다. 각 지파는 성읍을 배분받지만, 그 가운데 레위지파는 성읍을 배분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읍은 48성읍인데, 이 중 6개의 성읍이 도피성으로 지정 됩니다. 세 개는 요단 서편에, 다른 하나는 요단 동편에 있게 됩니다. 이 여섯 개의 도피성은 레위지파에 소속된 성읍입니다. 도피성은 부지중에 살인한 자들이 피하는 곳입니다. 부지중이라고 하는 것은 계획되지 않고 우연 또는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었을 때, 우발적으로 살인한 자를 살려주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법에 의하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살인한 자는 피의 보수자가 가서 살인한 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지금도 베두인 족은 그렇다고 합니다. 베두인 족은 자기 형제들 중 한 사람이 살인을 당했으면 그 가족 중에 한 사람이 피의 보수자로 설정을 해서, 그 사람이 끝까지 살인한 사람을 찾아가 죽이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살인자가 있으면 피의 보수자 한 사람을 선정하여 살인한 자를 죽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이스라엘 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측면에서 볼 때, 부지중에 살인자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일까? 예를 들면 도끼로 나무를 깨다가 도끼날이 날아가서 옆 사람이 도끼날에 맞아 죽었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사람은 사람을 죽였으니 죽어야 하지만, 이렇게 죽으면 너무 억울하기에 빨리 도피성에 들어가면 제사장이 고의적으로 살인한 지에 대해서 살펴본 이후에 판결이 나게 되면 도피성에서 거하게 됩니다. 대제사장이 살아있을 때는 도피성에 거하고, 대제사장이 죽게 되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도피성을 만든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도피성을 왜 만들었을까? 민수기 35장을 이야기 하면서 도피성을 만드신 이유를 세 가지 만들었습니다. 첫째는 공동체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는 생명의 존엄성을 알려 주기 위해서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공의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지만 도피성의 내용은 이 세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피성은 매우 구속사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도피성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단지의 이스라엘의 율법의 기능으로서 도피성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관점에서 도피성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도피성과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와 도피성의 차이와 그리스도와 도피성의 공통점은 무엇인가를 살펴볼 수 있고, 이러한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뜻하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앞에서 도피성에 대한 이야기를 알려들었기에, 오늘은 특별히 도피성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대하여 프란시스 쉐퍼 목사님의 견해를 가지고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쉐퍼 목사님이 가장 정확하게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도피성을 보면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도피성은 정의를 피할 수 있는 장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인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살인하는 자는 그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피성은 살인자가 피할 수 있는 장소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도피성은 고의로 살인하지 않은 자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도피성은 살인을 무조건 용서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피성을 통하여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하는 인간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살인하는 자는 반드시 징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사형 제도를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이 피를 흘리면 사람이 피를 흘릴 것이라는 말처럼, 개혁교회는 사형 제도를 인정합니다. 분명한 것은 살인한 자는 분명한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죽인 것은 하나님을 대적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살인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살인한 자에 대한 심판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은 실수 가운데 살인한 자의 생명을 빼앗은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측면에서 도피성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가지의 모습이 있는데, 의도적으로 살인한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대적한 자이기에 그 징계가 합당하지만,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생명을 앗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에 막는 장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도피성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도피성은 보편적인 정의의 법령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수 20:9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을 위하여 선정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 살인한 자로 그리로 도망하여 피의 보수자의 손에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그는 회중 앞에 설 때까지 거기 있을것이니라 도피성의 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법이다.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모든 자들을 위한 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중 법이지만, 동시에 이 법은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법령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보편적인 법,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법, 오늘 날까지 주어진 법은 도덕법입니다. 도피성은 도덕법은 아니라 시민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도덕법은 하나님의 성품이 법의 기초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도덕법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이 보편적으로 지키는 도피성의 법도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프란시스 쉐퍼의 목사님은 우주의 법은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우주의 모든 법 하나님의 성품을 떠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법은 상대적입니다. 예를 들면 헌법 재판관 9명 중 5명 이상이면 법이 통과됩니다. 이 법은 상대적인 법관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국제 사법 재판소에 있는 폴 로버트의 그림에는 법의 여신이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습니다. 그 칼이 가르치는 곳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보편법은 하나님의 성품이 기준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피성이 말하는 것은 보편법이 하나님의 성품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징계를 받고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도피성이 가지고 있는 모습을 살펴봅시다. 첫째로 도피성은 독특한데, 요단 동편과 서편에 있습니다. 도피성은 주변에서 가장 가까운 곳, 모든 사람이 가장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도피성은 어디에서도 빨리 도달할 수 있는 지역에 있습니다. 이는 도피성이 세워져 잇는 지역적인 특성입니다. 학자들에 의하여 본다면, 도피성은 각 성읍에서 가장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곳,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도피성은 항상 보수가 됩니다. 비가 오고 문제가 일어나게 되면, 곧바로 다리가 보수가 되고, 도피 지나는 곳에 계곡이 있다고 하면 다리가 설치되고 항상 보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언제든지 도피성을 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도피성 가는 곳 마다 이정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정표에는 ‘도피하라’는 큰 글이 쓰여 있었고, 달려가면서 볼 수 있도록 가는 길목에 도피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지중에 살인한 자이니 보수자에 의해 자기 목숨도 빼앗길 수 있는 데,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이 어디로 가야 할이지 모른다면 얼마나 당황하고 힘들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무섭고 두렵겠습니까? 그 도피성은 가장 가까운데 있을 뿐 아니라 그 길이 잘 보수되어 있었고, 다리도 잘 놓아져 있었고, ‘도피하라’고 하는 이정표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만큼 도피성은 독특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두 번째로 도피성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개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에게도 개방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이방인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일하다가 자신이 실수로 살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 시대에 차별금지법 때문에 난리가 아닙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가운데는 우리가 반대하지 않을 법들이 많습니다. 성별 차별, 학력 차별, 인종 차별을 받으면 안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적 지향도 차별도 받으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성적 지향이란 이성 동성, 양성애를 의미한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면 모든 차별에 대해 반대하게 되니까 매우 나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 독소조항이 있기에 무조건 찬성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힘듭니다. 다만 문제는 도피성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객이나 도피성은 항상 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닫힌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 년 내내 문이 닫힌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곳이 도피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도피성으로 피하지 않을 경우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도피성으로 피하지 않을 경우 법적으로 보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피성으로 들어오지 않는 이상은 어떤 사람에게도 도움을 받을 사람이 없는 것이죠. 도피성은 가장 빠른 곳에 있고, 그곳에는 늘 도피하고 하는 이정표와 함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독특한 것이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고, 365일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도피성이 아니고는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도피성의 모습입니다. 이 도피성의 모습을 잘 살펴보면 이는 우리의 영적인 삶과 영적인 연결고리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도피성은 영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보다도 그리스도와 유사성이라는 표현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로 도피성을 통해서 느끼는 것처럼 어디서나 도피성이 어디서나 이르는 것처럼 그리스도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쉽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피성과 다른 차이점은 도피성은 먼 지역에 있지만,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 옆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교회는 타락한 세상을 향해 도피하라고 외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만 생명을 살리는 곳입니다. 교회는 타락한 세상을 향한 도피처가 어디인지 알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도피처고 생명을 낳는 곳이라는 곳입니다. 계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그리스도께 오라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피성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뿐만 아니라 도피성은 유대인이란 헬라인에게 다 열려있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오는 길은 누구나 올 수 있습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그가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든지 올 수 있습니다. 어떠한 인종과 상관없이 그리스도께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오는 자들에게 결코 거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누구든지 나에게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목마른 자도 와서 내게 먹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목마른 자는 와서 먹으라고 말합니다. 무거운 짐 진자는 와서 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에는 참된 평안과 기쁨과 행복이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초청입니다. 바로 예수님 안에서 누구든지 그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오는 자들을 향해 문을 닫지 아니하시고 항상 눈이 열려져 있으신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충족한 도피처입니다. 세상의 어떤 도피처가 완벽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의 도피성은 무너지면 끝날 텐데, 그리스도만 전적인 도피처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그토록 커다란 대가를 치르신 도피성으로 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습니다. 도피성 외에는 생명을 부지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에게 어떤 도피처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로 오는 자는 내어쫓김을 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자는 그 누구도 안전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안식처이고 예수만 참된 도피처인데, 예수님을 떠나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도피성과 그리스도와 유사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도피처가 무엇인지 잘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도피성입니다. 여호수아 20장의 말씀을 통하여 도피성에 대한 구속사적 의미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피성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성경을 읽고 도피성이 있구나만 안다면 반쪽짜리입니다. 성경을 수없이 읽어도 자신에게 감동이 없고 바른 깨달음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도피성에 관한 말씀이 나에게 적응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도피성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도피성은 부지중에 살인한 자만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부지중에 살인한 자뿐만 아니라 모든 죄에 대하여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죄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위대한 우리의 도피처요 안식처인지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존귀하고 복된지를 알아야 합니다. 존귀한 것을 존귀한 것으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존귀한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성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른 복음에 대한 고백이 없고, 복음을 알면서도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로 은혜를 누리고 있다는 착각에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오늘 분명히 이야기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가십시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참된 도피처입니다.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십시오. 그리스도를 멸시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에게 가십시오. 이것이 교회가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아무 이야기 하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피성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도피처가 그리스도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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