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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22) - 룻기[6] 박석화 2014-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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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룻기2:8-13)

룻기 2장(2)

    오늘 말씀은 ‘들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을 붙여 보았습니다. 학생이 가장 기쁠 때가 언제인가 생각해 보면, 시험을 봤는데 시험 점수가 잘 나왔을 때일 것입니다. 더 기쁠 때는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한 만큼의 열매가 나타날 때 정말 행복해 할 것입니다. 반면에 열심을 다해 공부했는데 그에 걸 맞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이루말할 수 없는 슬픔과 좌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허탈이라는 단어가 적절한 모습입니다. 얼마나 허탈할까요? 이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쇼트트랙에서 금메달 직전에서 몸싸움에 나가떨어질 때 어떠할까요? 금메달을 바라보며 4년 동안 모진 고난과 훈련을 받아왔는데 마지막 순간에 실수하여 물거품이 되었을 때 그 허탈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삶이면 이 두 가지를 경험하는 것 같습니다. 기쁨도 경험하고 허탈함도 경험합니다. 이것이 우리 사는 세상의 모습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에서 이러한 모습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열심을 다하여 산 것 같은데 믿음의 열매를 보지 못하면 허탈해 하고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열심히 준비하고 하나님에 대해 열심을 다해서 하나님의 열매가 맺을 때 할렐루야라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 하나님 앞에 살았을 때 하나님이 그의 걸 맞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주시면 할렐루야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소리를 들은 우리 입술에 나오는 소리가 할렐루야라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신앙의 모습에서도 열매를 볼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구하고 두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주겠다고 했습니다. 줄 뿐만 아니라 흔들어 넘치도록 네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하고 찾을 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놀라운 은혜들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믿음이 단지 행위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행위로 구원을 얻지는 않지만,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을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것은 정말 다양합니다. 오늘날 많이 오용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재정과 관련하여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를 수준 낮은 신앙이고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믿음은 수준 낮은 곳에 노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들도 그럴듯하게 속여서 우리에게 포장된 선물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절과 점집에 가는 것도 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또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날 때 점이 맞는다고 말합니다. 수준 낮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삶을 수준 낮은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만 아니라 우리 삶의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전체에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보아스와 룻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랍고 충만한지를 보아스와 룻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것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의 인물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예비하여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이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르침,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선물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세 가지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8-11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성도의 정직한 삶을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한다면 나의 어렵고 힘든 삶에 즉각 반응하여 주셔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한다면 내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기다리지 말고 순간순간 나타나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고 건져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고 힘을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느냐면,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하시는 가에 대해 의심하게 됩니다. 내가 별 탈 없이 살다 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잘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는 삶이 하나님이 없어도 문제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가 우리에게 다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적극적으로 영적으로 깨어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날마다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일어나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면 기도하지 못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두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삶이 너무 편안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아도 별 문제없다고 하는 사람과 하나님께 아무리 아뢰었어도 내가 힘들고 어려운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어떤 응답하심과 도우심이 없을 때 기도하면 무엇 하냐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함께 하심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고 하나님과 함께 잠에 드는 삶을 삽니다. 하루가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고 하나님과 살다가 하나님과 함께 마무리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근신하여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우는 사자와 같이 자들이 찾고 있으니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자 잘 때가 아니라 깰 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잠자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잠자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를 24시간 보호하여 주신다고 살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하나님은 주무시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고 우리를 바라보시고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가장 좋은 것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나의 삶 속에서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큰 일에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을 때라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 때 그러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보일 때는 경건한데 보이지 않을 때 경건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제 모습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연약함이고 부끄러움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작은 일에 가볍게 여기고 큰 일만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정직한 성도의 모습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습은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 놀라운 선물을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2장 전반부에 살펴보았듯이 롯은 이방여인으로 어려운 결단을 하고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자기 고향을 떠나 이스라엘 땅으로 옵니다. 이스라엘 땅으로 온 룻은 이방여인입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그는 과부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총이 얼마나 따가왔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최선을 다하여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들을 말합니다. 그 할 일은 시부모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니다. 그는 시어머니를 위하여 먹을 것을 준비하였습니다. 떨어진 이삭을 주우며 나오미와 함께 허기를 채우며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는 룻이 열심을 다하여 이삭을 줍고 있는데, 그 밭의 주인인 보아스가 와서 룻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친절하게 대하여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룻 2: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룻 2:9)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이방 여인이 어찌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물을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자신이 떠온 물도 아니고 말이죠. 그런데 보아스가 친절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룻은 소녀들을 따라 가면서 이삭을 줍고 목이 마르거든 소년들이 떠 놓은 물을 먹으며 이삭을 줍는 일에 열심을 다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경험하면 당황하기도 합니다. 때때로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있으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은 친절 뒤에 있는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룻이 이렇게 말합니다.

(룻 2:10)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이방여인입니다. 이방여인인 나에게 친절을 베푸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방여인이라는 룻의 자기 고백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친절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자신에게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저에게 이러한 친절을 베풉니까? 저는 이방 여인입니다. 그래서 룻은 보아스에게 친절을 베푸는 이유를 묻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뜻밖에 답을 줍니다.

    (룻 2: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이 말씀 가운데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는 말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방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보아스에게 분명히 들렸습니다. 보아스는 유력자라고 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 지역에서 신망 받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보아스를 존중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이방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죠. 하지만 이 말씀 앞에 많은 생각을 합니다.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분명히 교훈하여 줍니다. 우리가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분명한 열매는 주어진다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해도 그에 걸맞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반면에 열심히 해도 열심히 살고 있는 나를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때 힘들어 합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학생이 열심히 공부 했는데 어느 날 공부하라는 말을 들을 때 속상하고 화를 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열심히 하다가 자신은 잠깐 쉴 때 공부 안한다고 이야기 할 때 화를 냅니다. 그런 경험을 해 보았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다고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룻은 최선을 다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 했습니다. 더구나 믿음을 가진 자로 그 믿음에 합당한 살을 살기에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눈초리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흔들리지도 않았습니다. 룻이 자신의 삶을 한탄하거나 포기했다면 이삭 주우러 안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서 그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룻의 모습을 사람들이 인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분명히 들렸느니라는 말 속에 룻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살면 세상은 우리를 인정합니다. 여기 처음에 왔을 때 난리법석이었는데, 기도합시다라고 하면 이제는 다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기도하지 않으면 음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지난번처럼 뜻하지 않는 선물을 주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나고 정직하게 묵묵히 맡겨진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기쁨을 주십니다. 분명히 보아스가 룻의 모습을 보았듯이, 오늘 우리의 삶과 교회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을 압니다. 들려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정직한 삶은 또 다른 의미에서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입술을 열어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고 간구하는 것이 기도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앞에서 정직하고 묵묵하게 사는 것도 삶의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의 기도를 들으실 뿐만 아니라 삶의 기도도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이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정직하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분명히 들었다고 하는 말씀 속에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이 우리의 모습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본문을 통해서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성도에게 상을 주시는 놀라운 사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자녀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십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11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상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상을 받습니다. 그것은 바울도 그의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후서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싸운 후 하나님이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상을 예비하여 놓으셨습니다. 이 상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지 모릅립니다. 이 상의 의미를 보아스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보아스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은 룻에게 멋진 선물을 주십니다.

(룻 2:12)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행한 일에 보응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으려는 자에게 온전한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보아스를 통하여 룻에게 축복으로 선포 된 것입니다. 보응하다는 것은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아스를 통하여 룻에게 한 이 말은 엄청난 것입니다. 과부로서 이방여인으로 객지에 와서 이스라엘 율법을 온전히 모르면서 살아가야 하는 삶은 쉽지 않습니다. 자칫 잘못 하면 어떤 불이익을 당할 지 모르고 험악한 꼴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를 통하여 믿음의 길을 걸어간 룻에게 준 선물은 너의 삶이 안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너를 평화롭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라고 하는 것은 내일의 삶이 변화무쌍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지금처럼 위험한 교통수단이 많은 세상에서 무엇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 이야기 해 줍니다. 너희 삶이 안전할 것이다. 내가 너와 평화의 언약을 맺는다. 이것이 룻이 하나님께 받은 선물입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상을 풍성하게 보상하여 주십니다. 온전한 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믿음의 길을 가는 너에게 풍성한 보상을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로 내가 응답하겠고 네가 모르는 일을 보여줄 것이고 내가 너에게 줄 것이다. 흔들어 넘치게 줄 것이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풍성하게 보상해 줄 것이다. 내가 지금 걸어가는 길이 힘들고 어려워 보이지만, 풍성하게 보상하여 준다는 것입니다. 안전하게 지켜줄 뿐만 아니라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약속입니다. 이방 여인 룻이 믿음의 결단을 가지고 살아갈 때 놀라운 열매를 얻게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지쳐있는 룻에게 큰 힘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삶이란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섬기기로 했는데 다가오는 고난과 힘든 상황 때문에 절망하고 계속 이길을 걸어가야 하는 가라고 하며 낙담하여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룻도 그러하였습니다. 살기 위해서 다 포기하고 왔는데 이삭이나 주워야 하는가? 그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룻을 통하여 다시금 배워야 합니다. 현실에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이 보응하여 주시고 온전한 상을 주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만이 함 행복과 기쁨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작음 것에 감사를 얻을 뿐아니라 큰 것으로 채움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눈앞에 큰 일이 벌어져야 감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웬만해서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작은 일에 감사한 사람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데, 큰 것에만 있는 사람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큰 것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진정한 신앙의 맛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교만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주시는 작은 것들일 때 어떻습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이러는 것 아니잖아요. 교만은 작은 것에 만족하지 않게 만듭니다. 작은 것에 행복하고 즐거워하십니까? 아니면 투덜거립니까? 교만은 결코 작은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은 것에 대해사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불행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룻은 하나님께 겸손하였습니다. 룻의 삶은 크게 변한 것이 아닙니다. 이삭 줍는 것만 보장된 것입니다. 보응하여 줄 것이다. 큰 상을 줄 것이다. 환경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전 이삭 줍는 것만 보장 된 것입니다. 그런데 룻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룻 2:13) 룻이 가로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룻의 마음을 보십시오. 고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룻에게 큰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룻은 이삭 줍는 것에 감사하였고,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입니다. 앞으로 보장된 것은 없습니다. 단지 이삭 줍는 것만 보장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룻은 엎드립니다. 겸손하면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계속하여 은혜 입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로 살 수 있음을 아는 자에게 풍성하게 내려주십니다. 그리고 은혜는 겸손한 자만이 구합니다. 찬송가 중에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하나님와 같이 고백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가 구해야할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를 달라고 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의 말씀처럼 지금은 은혜의 때라. 오늘 나의 삶은 구원받은 사람은 은혜의 때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때 그 은혜가 나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길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룻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지 알았습니다. 그 룻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 상주시는 자입니다. 겸손한 자에게 기쁨과 행복을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하나님의 모습에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열심히 믿음의 길에 가야 합니다. 주님의 보호 아래 있기를 원해야 합니다. 물질의 보호가 아닙니다. 권력의 보호가 아닙니다. 우리의 피난처는 하나님입니다. 삶이 어떠하든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은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 자세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아심과 상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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