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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향기 207 - 약함의 자리를 읽고 - 권혜영 성도 [믿음 라브리] | 정대원 | 2014-02-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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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표지가 참 마음에 들었다. ‘실패의 제자도’ 라는 부제가 붙은 파란 표지의 책. 나는 제목을 ‘악함의 자리’로 잘못 읽고는 악한 자리에 있었던 실패한 자들을 위한 책인가? 하며 책을 이리 저리 들춰보고 있었다. “악함의 자리?” 하며 중얼거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현진이가 말한다. “언니, 약함의 자리…” 앗! 악함의 자리가 아니라 약함의 자리란다. 그제서야 책의 목차들과 부제가 연결되어 다가온다. 누구나 약한 자리에 있었던 경험이 있다. 책의 표지를 보며 ‘나도 저렇게 고개를 떨구고 눈물 흘리며 간절하게 때로는 타는 심정으로 주님께 매달리던 때가 있었지.’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 찾아오신 주님은 말 그대로 구원자 그 자체였다. 마이클 호튼의 책 ‘개혁주의 세계관’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어 매우 기대가 되는 책이었다. 그 책에서는 개인적인 이야기 보다는 세계관 설명과 다른 예시들이 주를 이뤘지만 이 책에서 그는 부모님과 아내, 자녀들의 이야기로 삶을 공개한다. 주일학교 교사로 신학책을 거침없이 읽던 아내 리사. 여러 번의 유산과 힘들었던 임신으로 자신의 신학적 지식과 삶의 혼란을 느꼈던 그녀. 그녀는 자신이 가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스스로에게 위로를 줄 수 없었다. 그녀는 누군가 그녀에게 말씀을 선포해 줄 사람을 필요로 했다. 바로 설교를 말하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비전과 개인적 신앙에 머물던 과거의 나는 ‘설교가 그렇게 중요한가? 나 스스로도 성경을 읽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설교는 그저 예배의 한 부분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었다. 하지만 리사처럼, 삶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치열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해본 사람들은 설교가 어떤 것인지 안다. 그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설교자를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 진리 그리고 위로다. 리사가 힘들어 할 때 그녀에게 위안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거리가 멀어지고 서먹해진 시간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쉬운 고백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개혁주의 신학자라는 명성을 가진 그에게 이런 어두운 과거는 드러내기 쉽지 않았을 터.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고 그 치유과정을 소개하는 저자를 통해 적잖은 위로가 다가온다. 약한 자리에 있었지만 오히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서 일어난 모든 사람들은 이들에게 이런 일이 가능 했다면 나에게도 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말라위 부족 출신으로 온갖 역경을 이기고 유학길에 올라 영국 캠브리지 정치학 교수가 된 레그손 카이라를 언급하며, 카이라에게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일이 불가능하란 법은 없다고 한 호아킴 데 호사다의 ‘피라니아 이야기’가 생각난다. 물론 마이클 호튼이 언급한 영광의 신학, 십자가 신학에 비춰볼 때 피라니아 이야기 같은 책은 영광의 신학을 부추기는 내용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구보다 약한 자리에 있었던 레그손 카이라가 오직 말씀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았다는 이야기는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비록 하나님께서 약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두신다고 해도 우리는 그 분께 항변할 수 없다.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악이 존재하는 것에 놀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선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는 호튼의 언급도 이를 지지한다. 그렇게 되면 ‘내게 중재자가 필요하다!’고 외친 욥의 외침을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이렇게 까지 고난을 받아야 할 큰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의인이라고도 스스로 말할 수 없었던 욥은 중재자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몇 주 전 들었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도 나왔던 중재자 되신 예수님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복음의 위대함을 생각해보았다. 자살에 대한 저자의 독특한 관점에 대해서는 내게 여전히 큰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주를 의지하게 하는 성령께서 왜 그들에게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정을 하게 하셨는가. 그 책을 읽던 즈음 남편과 함께 집세를 내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느 가장의 유서를 읽으며 환경의 어려움으로 연약한 믿음 때문에 죽음이라는 결정 밖에는 할 수 없었던 이런 가여운 사람이 자살 했다는 이유로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집세를 감당하지 못한 한 가장의 죽음이 주거 개혁 운동을 부추기듯이 저자는 반복적 죄의 고리를 끊고 싶어 죽음을 선택한 한 동성애자의 죽음에서 신학의 잘못된 적용을 반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기 위해 또는 반복적 죄의 고리를 끊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모습에서 또한 공동체의 역할을 생각해 본다. 전적으로 타인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 할 수 있도록 절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해서 감사하고 행복한 존재임을 알게 할 책임이 공동체에 있고, 죄의 문제로 힘들어 하는 지체가 있다면 함께 아파하고 기도로 도와야 할 책임도 공동체가 짊어져야 하는 것임을 생각해 본다.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허다한 죄를 덮고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내가 되길 기도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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