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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을 바라보라’를 읽고/ 박종모 형제 | 신동식 | 2014-10-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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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을 바라보라’를 읽고 박종모 성도[청년 라브리] 지난 달 추천 도서였던 '영광을 바라보라'는 꽤나 오랜만에 읽게 된 로이드 존스의 설교 집이었다. 그의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그리스도인이 경험할 수밖에 없는 비참함과 절망 그리고 그 가운데서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에 대해 지속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요즈음 한국의 상황은 더없이 암담하기 그지없고, 우리는 그 가운데서 소망을 증거 해야 하는 소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만큼 가혹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성경 말씀의 기록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이 없다면 C.S. 루이스가 말했듯 하나님은 심지어 "가학적 변태성욕자"로 보일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것은 수많은 무신론자들의 논변의 근거이다. 신이 전능하고 선하다면 이 땅의 악과 고통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우리의 변론의 근거는 오직 기록된 말씀과 그 성취이자 약속인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다. 그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빛을 성령께서 조명하실 때에만이. 원리적으로는 분명하고 말로는 이토록 '쉬운' 것이 복음이다. 이런 복음의 특성 중 하나인 쉬움이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곤 한다. 그들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가? 그에 비해 복음이 말하는 답은 너무나 쉽다. 그런데 복음이 쉬운 만큼 그것을 삶에서 구체화하는 것은 어렵다 못해 불가능하다.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아니 우리 자신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고 소망을 가질 수 있는가? 이것이 나의 고민이었다. 그러던 중에 로이드 존스를 오랜만에 대면하게 된 것이다. 그의 특징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일관성일 것이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함으로 변치 않는 진리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 진리를 믿는 이들의 삶이 기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의 표정이 어둡고 억지로 교회에 끌려간다는 인상이 복음 전도에 큰 장애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의 설교를 읽으면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주님만이 소망이라는 말로 세상에 대해 냉소하진 않았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기쁨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분명 우리의 기쁨은 고통 속에 단식하고 있는 이들과 함께 하는 그런 기쁨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웃음에는 보나 목사님의 말처럼 눈물이 서려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런 기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나는 처음의 자리로 돌아왔다.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주실 수 있고,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그 평화와 기쁨,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지만 우리의 전 인격을 만족시키는 것임을, 내 작은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 고백할 때 알게 되고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그 자리 말이다. 우리의 삶의 모습도 사회의 부조리와 온갖 썩은 냄새를 풍기는 병폐도 그대로이다. 악취로 인해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고, 타인에게서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서도 풍기는 그 사망의 냄새가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고 온 땅에 진동하고 있다. 이 때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소망을 가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야 한다. 이런 기쁨과 평화, 그윽한 향기는 아픔 당하는 이들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우는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소망을 둔 우리의 기쁨을 보여 줄 때, 로이드 존스가 말했듯 복음이 다시금 편만해 지고 교회가 그 영광을 회복하고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샬롬이 부분적으로나마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 작고 일시적 샬롬을 통해서 영원한 샬롬을 또한 고대하고 바라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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