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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을 넘는 가지들”(창49:22) | 신동식 | 2015-03-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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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을 넘는 가지들”(창49:22) 
 구정은 잘 보내셨는지요? 어느덧 새해도 두 달이 다 지나가고, 날씨도 점점 봄을 기대하게 하는 듯 추위도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요사이 책을 읽다가 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인용된 내용을 다시 기록해 봅니다.    “보리스 콘펠드 박사는 러시아에 살던 유대인 의사였습니다. 그는 스탈린도 신이 아닌 인간이었다고 말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강제노동수용소에 던져졌습니다. 의사인 그의 임무는 죄수들이 병원에서 죽지 않고, 일하다 죽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죄수가 건강하든 아니든, 웬만하면 의료 카드에 건강하다고 적어 죄수들을 작업으로 보내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의 치료는 기계적, 형식적이 되어 가고 있었고, 점차 자신의 인간성이 파괴되고 있는 것을 느끼며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동료 죄수에게 전도를 받습니다. 절망의 바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데 이어 그는 깜짝 놀랄 소식을 접합니다. 그 수용소 안에는 일종의 지하교회 공동체가 있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유일한 의사인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으며 오늘 그 기도가 응답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날부터 자신이 복음에 빚진 자임을 깨닫고 환자들을 정성을 다해 치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수인들을 몹시도 괴롭히던 간수 하나가 의무실에 왔는데 순간적으로 그는 약물 주사로 죽일까 하는 유혹을 받지만 이내 기도한 후 마음을 돌이키고 살립니다. 이후 그는 의료품을 낭비하고 환자들에게 관대하다는 경고를 몇 번 받습니다. 다시 한 번 죽을 사람을 살리면 대신 그가 죽을 것이라고 통고를 받습니다. 그 후 한 번은 장암에 걸린 남자를 만나 치료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수용소 경고를 무시하고 그를 살립니다. 그의 소생이 확실해진 어느 날 치료받던 환자가 이렇게 하면 당신의 생명이 위험한데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괜찮아요. 당신과 나를 살리기 위해 이미 죽으신 분이 있으니까요." “그가 누구냐?"고 묻는 환자의 귀에 그는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속삭입니다. 이 사람을 살린 것이 알려지면서 이 의사는 공개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던 그 순간, 그에게 살림을 받은 환자는 그가 전해 준 복음의 소식을 상기하고 흐느끼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드리면서 고백합니다. “보리스, 이제는 내 차례입니다. 이제는 내가 그 사랑을, 그 생명을 전하겠습니다. 그의 이름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노벨상 수상작가요, 우리 시대의 예언자적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보리스 콘벨드 박사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의 희생적 죽음으로 살려진 솔제니친이 누구인지를 알기에 이 실화의 극적인 결과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인간애를 넘어서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드려진 감옥에서의 그 숭고한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헛되이 하지 않으신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이 현지 지도자들과 교회 후원 사역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무명한 자들처럼 보이지만 우리들이 기도하고 사랑하는 현지 영혼들 중에 혹여 또 다른 솔제니친과 같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나올 줄 누가 알겠습니까? 무엇보다 죄인된 인간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하며 변화될 때 그들이 세상에 미칠 하나님의 영광은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지난 교회사 속에서 헬렌 켈러를 도운 선생님이나 무디를 양육했던 주일학교 선생님처럼 무수한 무명의 그리스도인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늘 겸손가운데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인정하며 나보다 다른 사람들의 가치와 존귀함을 인정하고 늘 배움의 자세로 사는 것이 지혜임을 생각해 봅니다. 이미 우리는 복음의 큰 은혜를 얻은 민족으로서 마땅히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의무이자 큰 특권이라 여겨집니다.    올 네이션즈 교회 남양규 목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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