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포 눈 눌 | 신동식 | 2015-09-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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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포 눈 눌 김항석 집사[사랑 라브리] 무엇일까? 언제부터 ‘동네교회’라는 말처럼 그냥 그런 교회로 전락한 것일까? 분명 세상 어딘가에 있는 교회가 이웃을 섬기는 일을 진정으로 행하는 것에 대해서 숙지하고 있다함은 그 중요성과 자신의 세계관에 (즉 믿음에) 이웃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해야 하는 ‘가포눈눌’ (가난한자, 포로 된 자, 눈물을 흘리는 자, 눌린(억압 받는 자))의 이들에게 행해야 하는 명령이 분명 성경에 기록 된 바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이미 태초 전에 정해져 있다. 새삼스럽게 교회의 사명 중 하나인 지역 공동체를 섬겨야 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최근에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 자신도 생각을 고쳤기 때문이다. 분명 교회가 지역을 섬겨야 하는 이유는 타당하며 그 역할도 이해는 했지만 사실 교회의 본분 목록에서 상당히 아랫단에 위치 시켰던 나이기 때문이다—그 이유는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행하던 일들이 미국 청교도들의 역사에서 마을 단위의 공동체의 중심이 시청이 아니라 교회였던 배경을 예를 들면서 이는 현재의 복지/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 역할이 정부로 넘어갔기에 교회는 다소 그 책임이 덜 있다고 믿었기 때문. 하지만 중고등부 친구들과 하이델베르그 공부를 하던 중 한 가지 주신 생각이 내 그릇된 생각을 고치게 했다. 98문에 보면 “그렇다면 교회에서는 “평신도를 위한 책”으로서 형상들을 허용해서도 안 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말 못하는 우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말씀에 대한 살아 있는 강설을 통해 가르침 받기를 원하십니다”라고 한다. 즉 만약 지역에 전도의 대상 (남녀노소를 다 포함한다)자들 중에 성경을 읽지 못하거나 이해하기 힘들거나 그런 경우 이는 가르침이 있어야 하며 다음 세대를 위한다면 교회는 더 일찍이 교회와 지역의 아이들이 글을 배우고 이해력이 증진되며 사고 할 수 있는 존재로 양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을 섬기는 이유가 바로 주의 말씀을 온전하게 전하기 위함이라면 누가 지역을 섬기는 것에 소홀히 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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