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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10) - 사사기[24] 박석화 201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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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사사기16:23-31)

 

 

사사기 16장(2)

 

오늘은 삼손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삼손의 28절의 말씀이 마음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삿 16: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나를 생각하옵소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말을 하고 있는 삼손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묵상하여 보십시오. 얼마나 처절한 상황인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국어를 잘해야 말씀을 잘 이해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 는 말을 잘못 읽으면,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라고 잘못 이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말씀을 이해하려면 말씀에서 말하는 정황을 알아야 바로 이해할 수 있고, 문맥의 앞뒤를 살펴보면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삼손이 지금 ‘나를 생각하옵소서.’라는 표현은 신나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삼손은 목숨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는 애끓는 소리로서 ‘나를 생각하옵소서.’하는 말입니다.

이번만 나를 사용하옵소서. 이 말에는 애끓는 심정을 이해하여야 온전히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삼손은 들릴라에 의해서 자신의 힘의 근원이 노출되었고, 결국 자신의 힘의 근원이었던 머리카락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머리카락이 빠졌다고 해서 힘이 빠진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이는 단순히 머리카락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징하는 있는 것입니다. 머리카락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하나님과의 큰 징계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블레셋 사람에게 잡혔고 두 눈이 빠졌습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나온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나를 생각하여 주소서. 블레셋 사람을 단번에 갚게 하소서. 나를 생각하시고, 나에게 힘을 주시고, 내가 원수를 갚게 하소서.’ 사실 삼손은 이런 자리에까지 이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이러한 자리에 갔습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에 이러한 장면을 표현한 말이 있습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갈며’ 라는 표현입니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절망만 남은 상황입니다. 이 상태가 빠진다는 것은 비참한 것인데, 그런 사람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오늘 삼손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한 사람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리에 있게 됩니다. 물론 신약 성경에서 말한 바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은 삼손이 처한 곳보다 더한 곳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일을 감당하지만,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은 더 이상 회복이 없는 비참한 곳입니다. 왜 이러한 자리에 이르게 되었을까? 입다를 생각해보면 삼손은 모든 면에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가춘 사람이 어떻게 처참한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을까? 삼손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자리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가정 예배를 드리지요? 나중에 땅을 치며 통곡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가족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보다 바쁜 일은 없습니다. 같이 모여 기도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개인을 위해 기도하면 예배의 자리를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삶과 기도하는 삶은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삶을 사는 사람, 가족이 모여 예배하는 사람이 예배에 충실합니다. 예배 가운데 주어지는 기쁨과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청산유수와 같은 말로 설교하고 기도한다고 해도 일상에서 예배와 기도의 삶이 없다면 들리는 소리가 힘 있게 들리지 않습니다.

삼손의 일상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고 자신의 힘과 아집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힘을 마치 자신이 가지고 누리는 것으로 생각하며 행동한 삼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다움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슬픈 자리로 떨어집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도 하나님의 구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결국 블레셋을 물리칩니다. 그러나 삼손과 방법과 같은 일을 이룬다면 너무나 슬픈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실 인으로서 같은 삼손을 보면서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서있는 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절실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나는 작아지고, 초라해지고, 스스로가 불쌍하다고 느낍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이타적인 모습이 보이게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보입니다. 거기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삼손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길이 묵상하고 살았다면 이런 비참한 자리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준 하나님의 힘을 잃고 다시 힘을 달라고 하는 삼손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러한 모습에 떨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삼손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첫번째 슬픔은 하나님이 언약을 떠난 이들은 세상에서 조롱거리가 됩니다. 삼손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된 것을 보십시오.


(삿 16:23) 블레셋 사람의 방백이 가로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붙였다 하고 다 모여 그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삿 16:24)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가로되 우리 토지를 헐고 우리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붙였다 하고 자기 신을 찬송하며

 

하나님 앞에서 우상이 칭송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상이 신으로 여기게 착각한 것입니다. 교회가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 교회인지 모르겠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하여 봅시다. 나 때문에 이 동네에서 잘못 소문이 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여 보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나요? ‘나로 인해 부끄러운 소문을 나타내지 않는지?, 예수 믿는 사람답다는 말을 듣고 있는지?’ 내가 믿는 신이 나은 것 같더라. 내가 보니 너희 신이 진짜 신이 아니고 내가 믿는 신을 믿어라는 것이 조롱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떠나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말씀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는가? 가정에 모여서 예배하는 모습과 흩어지면 주의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두 번째로 슬픈 것은 이방인들을 위한 재주부리는 자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삿 16:25)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여기서 사람들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그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주를 부리게 하자는 것은 재롱부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방인들 앞에서 모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웃음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무엇입니까? 어떻게 이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목숨 걸고 믿음 생활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우리가 진실한지 아닌지 알아봅니다.

기윤실 통계에 의하면 사람들 10명 중 2명만이 기독교인을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에 대해 사람들이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재주부리는 존재일 뿐입니다. 슬픈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성도는 조롱거리가 됩니다. 우리 스스로가 부끄러운 존재로 살아갑니다. 문제는 삼손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 들어가야 깨닫는 다는 것입니다.


세벤째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참된 소망임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본문을 보면서 여기에 머무른다면 소망이 없습니다. 삼손의 마지막 외침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조롱하는 자를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힘을 얻을 때 소망이 있습니다. 그 외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나를 생각하시고, 힘을 주시고, 나로 하여금 원수를 갚게 하소서. 하나님의 자녀인 나를 조롱하는 자들에게 징계를 내려주소서. 개인적이고 사적인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 대해 징계를 구하는 모습입니다.

 

(삿 16:30)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삼손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했습니다. 진정성 있는 표현 속에 이제 삼손의 진정한 회개가 있는 것입니다. 처절한 삼손의 낮아짐과 하나님을 향한 무릎 꿇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삼손을 들어서 삼손을 조롱하였던 자를 일시에 심판하십니다. 삼손이 살아서 죽였던 숫자보다 이때가 더 많았습니다. 두 눈이 있었을 때보다, 두 눈이 상실되고 하나님을 의지하였을 때, 더 많이 죽었다는 것은 정말 의미 있는 표현입니다.

사람의 힘을 하는 것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할 때 우리의 지혜를 넘어서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능력을 가질 수 있고, 참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였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조롱거리로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로 볼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을 때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모든 환경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께 능력을 가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할 때 우리는 모든 환경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환경이 많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하게 보이는 우리의 환경이 하나님 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와 함께 하느냐.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느냐. 애끓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를 향한 애끓는 심정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쌍함을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생각할 때 세상은 우리를 향하여 두려움을 갖습니다. 가진 것이 없고 능력이 없다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세상이 우리를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까불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사로잡혀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기대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부끄러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생각할 때 세상은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엄한 손길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데 누가 우리를 헤치겠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고, 구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고, 세상이 두려움을 갖게 되는 자리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생각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는 능력과 힘을 얻어서 싸울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살 수 있고 정직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저를 생각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은 그 소리를 들으시고 일하셨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그러면 얻을 것이고, 찾을 것이고, 열릴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포기하지 말고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고. 우리가 교회의 길 길에 기도함으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고, 나를 생각하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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