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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식 목사의 구속사적 성경연구(211) - 사사기[25] | 박석화 | 2014-03-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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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 연구 (사사기17:1-13) 사사기 17장 삼손의 이야기는 16장으로 끝나고 사사들의 이야기가 끝납니다. 이제 사사기 17장부터는 6절의 말씀처럼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씀으로 마지막 장까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18:1, 19:1, 21:25) 삼손을 끝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은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자기 주관대로 살았다는 것은 아주 멋지게 들립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긍정적인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멋대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은 것이고 자신이 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한 것이 옳은 것입니다. 조금 더 나가면 하나님도 자신 때문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신을 만들 수 있다는 자리까지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이고,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이고, 자신이 법이 되는 것이고, 자신들이 진리가 되는 것이고, 자신의 뜻대로 결정하고 판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이스라엘 모습을 향하여 불행한 자라고 합니다. 사사가 없는 시대의 모습입니다. 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자입니다. 선지자 들이 나오기 전에 하나님은 사사를 통하여 그 직임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사사들도 구약 성경에 의하면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사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이 자기 소견대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주는 가장 큰 불행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대해서 많은 욕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가나안 성도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교회를 찾고 있는 성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광야를 방황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암담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나안 성도들이 생긴 이유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원인 제공은 목사와 교회 공동체가 주었을 것입니다. 정직하지 못하고 바른 복음을 전하지 않고 불법을 행하고 사랑이 없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고 건강한 교회를 찾고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한편으로 그 이면을 보면 자기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내 귀를 시원하게 해주는 교회를 찾는 것입니다. 중심적인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있지만 또 하나는 가나안 성도가 심중에 가지고 있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신앙생활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야기하기를 바른 교리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고서는 그 교회에서 믿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바르게 전하지 않는 교회라면 교회를 옮기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 바른 교리를 전하는 교회가 없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바른 교리를 전하는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가 딱딱하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면 우리 마음이 아프기에 자신의 마음을 시원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사사 시대의 모습과 같이 자신의 모습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가 슬픈 현실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소견대의 옳은 대로 사는 것은 이스라엘 현실을 바로 보여주는 것이며,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대로 살았다는 것은 왕을 소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왕이 없었다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왕이 없다는 것과 자기 소견대로 행하였다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가 무너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전부 목사가 되고 집사가 된다고 생각하면, 교회는 엉망이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이후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매우 중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왕이 없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무질서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무질서는 혼란하다는 것이고, 혼란은 불안감을 가져다 주는 것이고, 총체적 난국으로 치닫게 되고 슬픈 상황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소견대로 살고, 왕이 없다는 것의 내용입니다. 사무엘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에게 왕을 달라고 합니다. 이 본문에서 사사의 내용이 보이지 않고, 사무엘상을 보면 마지막 사사라고 하는 엘리 제사장의 내용이 나옵니다. 엘리 제사장이 올 때까지의 내용을 사사기는 기록하지 않고 있고, 왕을 기대하기 전에 엘리의 모습을 보는데, 엘리의 모습을 보니까 삼손 이외에는 사사가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정도로 엘리는 무능하였고, 그의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지 못한 총체적 부패를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따라 살았다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가진 총체적인 난국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게 된 그래서 왕을 기대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다시 말하면, 총체적 타락에 이르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총체적 난국으로 추락하였는가? 어떠한 모습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어떠한 모습이 있기에 그러할 까요? 이는 오늘 우리의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적으로 독자적으로 총체적 난국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있던 일의 반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제나 오늘토록 진리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 시대로부터 먼 시대의 기록된 것임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생명력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적실하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시대적 환경이나 배경은 다를지 모르지만 그 내용은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 들려지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잘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이 우리에게 옛날 책처럼 끝날 것이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말씀으로 들릴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내가 가야할 삶의 방향을 막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바른 깨달음을 가지게 하여 달라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설교자도 살아있는 말씀을 통하여 힘을 얻고, 기쁘고 담대하고 살아갈 수 있게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 합니다. 성도도 동일합니다. 이 믿음과 사실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준비가 없이 말씀을 듣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설교자 설교할 때 말씀에 확신도 없고 듣든지 말든지 하고 설교한다면 그처럼 허망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말씀에 대한 기대감도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갈급한 심정 없이 말씀을 듣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처럼 허망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 허망함의 끝은 슬피 울며 이를 갈게 것입니다. 이러한 총체적 난국에 이르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시기 17장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신앙의 타락입니다. 바른 가르침에서 탈선이 총체적 난국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보게 되면 13절로 되어 있습니다. (삿 17:1)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에브라임 지파는 아주 중요한 지파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에 미가라고 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미가라는 이름의 뜻은 ‘누가 여호와 같은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름에 맞는 모습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요. 본문 가운데 이름과 역설적으로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은 일천 일백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가의 어머니가 저주의 소리를 합니다. (삿 17:2)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생각하여 보십시오. 돈을 훔쳐왔습니다. 그러니 저주했습니다. 도로 돌려주었더니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3-4절은 이런 미가의 보습을 보고 그 어미가 개인 신상을 만듭니다. 미가를 위한 신상, 이것은 에봇을 말합니다.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는 옷입니다. 판결할 때 입는 옷입니다. 제사장들이 입는 것이고 권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에봇을 만들고 에봇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의 자리에 있게 된 사건, 기드온에 대해서 기억을 할 것입니다. 기드온이 전리품 대신 에봇을 만들고 사람들이 절하게 되고, 우상 숭배를 하는 모습에 이르게 된 것을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가의 어머니도 미가가 훔쳐간 돈 은 이백을 가지고 에봇을 만듭니다. 그리고 5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삿 17:5)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에봇이 있으니 제사장을 삼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미가 집안의 내용이었다고 한다면, 이제 장면이 바뀌어서 7절부터는 미가 집안으로 오고 있는 레위인 소년을 보게 됩니다. 레위인들은 각 지파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각 지파는 레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을 베풀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레위 소년이 에브라임 지역가게 되었고 미가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삿 17:9)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뇨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10절을 보면 자신을 위한 제사장이 되어 달라고 합니다. (삿 17:10)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하므로 레위인이 들어갔더니 13절을 보면, 레위인이 제사장이 되었으니, 여호와께서 복 주실 줄을 안다고 합니다. 복도 자신의 주관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모습입니다. 삼손 이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이 본문 내용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이스라엘이 총체적으로 타락한 모습입니다. 신앙과 신학의 타락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앙과 신학의 타락의 모습이 미가 집안의 모습입니다. 미가 집안의 모습 어떤 모습이 신학과 신앙의 타락의 모습인지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이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중심적 신앙이 아니라, 말씀 중심적 신앙이 아니라 철저하게 종교화된 신앙입니다. 계시 중심적 신앙이 아니라 복 받는 종교적 신앙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세속화가 된 것입니다. 이방인들과 같이 세속적 신앙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세속화된 신앙으로 이스라엘이 떨어진 것입니다. 미가의 이름의 뜻 가운데 있는 ‘누가 여호와 같은가’라는 말은 여호와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공의의 하나님이고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여호와 같은 가라는 뜻을 가진 미가의 이름을 부르는데, 이 거룩하신 여호와의 이름에 먹칠이 칠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은 거룩한데, 이름에 걸맞지 않는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미가와 그 어머니가 말하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낸 신 일 뿐입니다. 개인 우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세속화된 신앙의 핵심은 개인의 부와 행복에 그 중심이 있습니다. 종교는 무엇입니까? 왜 사람들이 각종 무당들을 찾아갑니까? 자신들의 행복과 부와 성공을 위하여 찾아가는 것입니다. 비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좋은 일만 일어나게 하소서. 잘 되게 하소서. 같은 것입니다. 계시의 종교는 우리는 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내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시작은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목적이 나의 성공과 나의 만족과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데 살고 싶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이 우리는 처음부터 이타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때때로 내가 손해보고 고난이 와도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깊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자녀를 키우다 보면 알게 됩니다. 때때로 자녀들에게 호되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귀엽고 사랑하는 아이를 왜 혼을 내야 합니까? 그들을 위해서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고 너희 생각보다 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그러나 세속화된 종교는 개인 우상을 만들고, 개인의 만족과 필요를 위하여 자신을 위한 신을 만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지 말아햐 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나에게 고난을 주신 이유를 묻습니다. 남들이 잘되는 것이 나에게 잘 되지 않는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고난을 원망하거나 고난에 사로잡혀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인생이 아니라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몸부림치며, 순종하며 사는 것이 말씀의 신앙입니다. 자신의 삶에 유익이 될 때는 기뻐하고, 유익이 되지 않을 때 저주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미가의 어머니의 모입니다. 돈을 잃어버리자 어마어마한 저주를 하였습니다. 이 저주가 어마어마한 저주였는지 돈을 훔쳐간 미가가 어머니의 저주를 듣자 돈을 가져옵니다. 웬만한 저주는 사람들이 훔쳐간 돈을 잘 가져오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어떠한 저주를 퍼부었는지 모르지만 미가가 금방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삿 17:2)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한 범죄에 대해서 징계를 받아야 하는데, 그런데 죄에 대한 고백도 없고 자기 마음대로 저주도 받고 복도 받습니다. 어머니는 단지 돈이 왔다는 것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미가가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가 어머니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합니다. 이런 미가의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미가의 모습에도 나타납니다. (삿 17:13) 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모두 복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저주를 받고 가져온 자의 복을 선포함에 있어서 미가나 미가 어머니나 복을 받는데 열심을 내고 있다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을 봅니다. 두 번째로는 종교화된 신앙의 모습은 하나님을 개인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삿 17:5)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자기 제사장으로 삼은 것입니다. 10절 말씀처럼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고 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입니다. 미가가 하는 말이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할 제사장을 자신을 위한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를 자기 개인의 제사장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성도들이 내 귀에 편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합니다. 한 목사님이 복음을 설교를 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집에 돌아간 목사님에게 한 집사님이 찾아와 말하기를 , 오늘 설교 참 좋았는데, 죄인 된 설교를 강하게 해서 우리 아들이 교회를 옳기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죄에 대한 설교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책상에 병을 가져왔는데, 그 병에 독약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독약을 쓴 병을 뜯고 먹으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집사님이 그냥 돌아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그것은 세속화된 종교의 모습이고, 총체적 난국에 이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총체적 난국은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정확한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설픈 신앙생활을 하면 어설프게 넘어갑니다. 힘들어도 바른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더더욱 바른 복음, 바른 신앙 안에 설려고 노력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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